[‘올인’ 인생 차민수 20] 주조와 루이, 중국 바둑커플 사연 들어보니
[아시아엔=차민수 드라마 ‘올인’ 실제 주인공, 강원관광대 명예교수, <블랙잭 이길 수 있다> 저자] 중국을 처음 드나들던 시절 얘기다. 내가 아끼는 두 중국 기사가 있었다. 강주구(江鑄仇, 주조)와 예네위(芮乃偉, 루이 나웨이)가 그들이다. 중국의 천안문사건은 바둑계 인사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대학생 바둑사범을 맡고 있던 주조는 미국으로, 루이는 일본으로 건너가 아마추어 선수들을 가르치며 생활하고 있었다. 천안문 시위가 절정을 이루었을 때 대학생들이 루이에게 천안문 광장에 들고 나갈 구호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루이는 소문난 명필가였다. 사람 좋은 루이는 흔쾌히 허락하고 써주었는데 천안문사건이 끝난 후 루이의 필체를 알아낸 당국이 제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대회 참가나 북경에서의 생활도 어렵게 되자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둘이는 오빠 동생하고 지내던 사이였다. 같은 이유로 제재를 받던 주조는 미국으로 갔고, 서로는 이역만리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응창기배에서 다시 만나 타향에서 웨딩드레스도 없이 결혼하게 되었다.
두 사람 다 타고난 바둑의 재능을 일찌감치 세계적으로 널리 인정받은 기재였다. 주조는 中日 대항전에서 일본의 기라성 같은 9단들을 상대로 6연승을 한 바가 있다. 루이는 鐵女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세계 최정상 남자기사들도 두려워하는 여류 9단이었다.
국수전에서 조훈현 9단에게 도전해 당당히 타이틀을 따낸 적도 있다. 이듬해 조훈현 9단에게 다시 빼앗기기는 하였지만 여류기사가 우승을 한 것은 세계 바둑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일본의 여류기사들은 바둑이 약한 까닭에 루이가 일본에서 기사생활을 하는 것을 반대하여 루이는 일본에서 바둑을 둘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런 사정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세계최강의 여류기사가 시합을 못하고 평생 아마추어나 가르친다는 것은 바둑계도 큰 손실이라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둑도 공부할 시기가 있다. 정식으로 시합을 하지 않으면 자꾸 뒤떨어지기 마련이다.
중국과 왕래하면서 나는 이들의 징계에 대한 부당함을 중국의 고위인사와 중국기원측에 끈임 없이 재고해 주기를 요청하였고 그러는 사이 5년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들이 한국에서 기사생활을 할 수 있게 제재를 풀어달라고 했다.
드디어 중국이 내게 답을 주었다. 중국기원은 이들을 풀어주면 열악한 환경에 있는 중국기사들이 대거 외국으로 건너갈 것을 우려하였다. 나는 이들 이외에는 어느 중국기사의 외국행에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이들의 한국에서의 기사생활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공문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참으로 5년이란 세월은 두 사람에게는 길고 긴 인고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한국이라고 이들의 한국행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이들이 한국프로에 들어오면 자신의 수입에 지장을 받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당시 한국의 여류기사들의 바둑은 동양 3국 중에 가장 약했다. 나는 기사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설득하였고 한상열 사무총장, 조훈현 국수도 도왔다.
나는 많은 여류기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여류기사들은 일본여류와는 달랐다. 루이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망정 루이에게 한수 배우고 싶다는 것이다. 한국여류 바둑은 세계정상에 오르게 된 반면 일본여류와 일본바둑은 동양 3국 중 최하위로 낙후된 게 그런 차이가 아닌가 싶다.
기사들 의견도 찬성파와 반대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찬반투표 결과 75%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됐다. 가결이 되자 나는 바로 미국으로 전화를 해 기쁜 소식을 전했다. 전화기 저편에서는 두 사람이 말없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너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들의 바둑을 좋아하는 팬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이었다. 사람에게는 타고난 인성이란 것이 있다. 두 부부는 참으로 인성자체가 착한 사람들이다.
루이는 시합바둑만 둘 수 있다면 너무나 행복해 한다. 그들은 중국의 제재가 풀려 12년간의 한국생활을 접고 중국에서 다시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