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 인생 차민수23] 카지노서 만난 ‘문경지교’ 토니, 알고 보니 中태자당 출신

‘문경지교’ 토니(왼쪽)

[아시아엔=차민수 드라마 ‘올인’ 실제주인공, 강원관광대 명예교수, <블랙잭 이길 수 있다> 저자] 문경지교(刎頸之交)라는 말이 있다. 목숨을 대신 바칠 수 있는 친구관계를 말한다. 서로 어려울 때 만나 동고동락을 같이 한 경우 일컫는 사이를 흔히 말한다.

1984년 카지노에 처음 취직하였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작은 게임이나 중간 정도 사이즈게임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우연히 만난 친구가 있었다. 중국에서 온 토니였다. 나와 함께 일하게 된 동료란다.

중국인이 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는데 나는 미국에 오래 산 중국인인 줄만 알았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갓 온 중국인은 왠지 모르게 옷차림이나 풍기는 것이 무언가 달랐기 때문이다. 헌데 이 친구는 전혀 본토 냄새가 안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의 7공자 중에 한명이었던 것이다. 중국에 있을 당시 이들 7공자들은 하루 2만위안 어치 술과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일반인 월급이 170위안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돈이었을 지 알 수 있다.

이 소문이 등소평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노발대발한 등소평이 이들을 당장 잡아들이라고 북경의 공안부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공안부장이 명단을 받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들을 잡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이들 아버지 신분이 보통사람들이 아닌 당대 최고의 가문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다. 북경시장, 장관, 총리의 아들 등 전부 다 현직에 있는 세도가인 태자당의 자제들이니 이들을 잡아들였다가는 누구 손에 다칠 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토니의 아버지는 모택동과 같이 혁명을 하였고 아버지보다 17살 위였던 모택동은 토니의 아버지를 막내동생으로 생각하고 끔찍이도 이뻐하며 챙겼다. 그래서 장관자리를 바꾸어 가며 경제 관련 장관만 30년을 해온 분이다.

잡으러 가지 않을 수도 없다. 아버지인 장관을 찾아가 공문을 보이며 “장관님 상부에서 이런 명령이 내려왔으니 3일 후에 아드님을 모시러 오겠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체포하진 않겠으니 빨리 해외로 피신시키시라는 뜻이다.

토니 부친은 당시 에너지장관을 맡고 있을 때라 주중 미국대사와 아주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미국대사가 그날로 비자를 내주어 다음날 미국으로 출국했다고 한다.

토니와 나는 이렇게 운명처럼 만났다. 한번 시작된 인연은 30년 넘게 절친한 친구가 되어 지속되고 있다.

나도 바로 이때 한 카지노에 취직해 만나게 되었으니 인연이란 묘한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토니는 그 후 제재가 풀려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혼과 생활고에 빠져 있던 나는 중국에서 도망치듯 나온 그는 낯선 이국땅에서 동고동락을 함께 했다. 그를 떠올리면 문경지교란 말이 생각나곤 한다.

내가 중국을 방문할 때면 같은 호텔 옆방에서 머물며 내가 떠날 때까지 한데 붙어 지낸다. 내가 손님을 초대하고 계산을 하러 가면 이미 토니가 다해 놓았다. 토니는 그런 친구다.

토니의 아버지가 살던 곳은 천안문광장 옆에 있는 총리들의 관저라고 불리는 곳이다. 전직 장관이나 총리급 이상만 모여 사는 곳이다. 자연히 어릴 적부터 형님·동생 하며 태자당의 모임이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중국을 방문할 때 문안인사를 가면 재직 시 받은 선물들을 보여주신다. 큰 방에 가득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고르라고 하시는데 너무 비싸고 좋은 물건들이 많아 엄두가 안 나 망설이면 “이것이 좋은 것”이라며 싸 주신다. 인자하시기가 얼굴에 쓰여 있는 그런 분이었다. 그런 인자하신 모습과 처세로 장관직을 오래도 한 것 같다.

토니의 형은 나하고 동갑나기다. 군사전략가 이면서 군사대학 겸임교수와 인민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중국의 대부분 장성들이 그를 형님이라고 부른다. 한번은 그의 식사 초대를 받아 북경상공을 방위하고 있는 북경의 항공방위사령부라는 공군부대 안 호텔로 가게 되었다.

중식조리장은 중국 요리대회에서 일등을 한 북경 최고의 요리사란다. 외국인은 들어갈 수 없는데도 한국인으론 최초로 공군부대 안에 들어갔다. 자동차 여러 대를 나누어 앞뒤로 호위를 하고 부대로 들어가는데 곳곳에 군복 입은 군인들이 대포를 옮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자리에는 북경의 실력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척 넓은 공간 안에 놓인 식탁 3개의 간격이 얼마나 멀던지···. 가만히 보니 뒤쪽으로 그림인지 자수를 놓은 건지 만리장성이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있었다. 나는 이렇게 중국각지에 있는 태자당 지도자들이나 당고위직 인사를 쉽게 만나곤 하였다.

그동안 중국을 다니면서 만난 중국 인사는 3천명은 족히 넘었다. 이것이 꽌시(관계)가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누구의 친구이냐가 중요하다.

꽌시라는 말이 나온 김에 생각나는 사람이 또 있다. ‘쇼티’(Shorty)다. 키가 작아 토니와 내가 함께 붙여준 별명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손권의 동네 후손들은 등소평처럼 신장이 작은 게 특징이다.

북경과 상해 사람들과 북방 사람들은 대체로 신장과 체격이 큰 편이다. 나는 아직도 그의 본명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항상 그를 쇼티라고 불렀다.

나하고는 형님(따거)과 아우님(소형제)으로 불러 이름을 모른다. 그도 나를 ‘미국동생’이라고만 부른다.

쇼핑을 갔다가 우연히 둘이서 만난 적도 있다. 통역을 서로 대동하지 않아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냥 “형님 동생”만 하고 끌어안고만 있었다.

중국에서 꽌시라면 어떤 사이인가가 중요하다. 그런 꽌시를 열 수 있는 것은 상호간 그동안 쌓아온 우정이다.

쇼티는 등소평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키는 작지만 아주 저돌적이다. 등소평이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장애인협회 회장직만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중국의 대내외 주요 의사결정을 결재했다.

천안문 진압사건 같은 것도 그의 결재가 없이는 못하는 것들이다. 당 서열 14위 쇼티는 그같은 등소평의 비서였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김일성의 친구였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김일성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였다. 그 다음에 만났을 적에는 “김일성이 잘한 것은 인민을 굶어 죽이지 않은 것 밖에 없다”는 말로 바뀌었다. 또 그 다음 번에는 “2천만명도 못 먹여 살리는 사람이 무슨 지도자냐”로 또 바뀌었다. 고난의 행군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이 생긴 북한의 김정일을 비난하는 말이었다. 그는 나를 만나면서 친한파로 조금씩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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