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 인생 차민수 25] 미국에 바둑 보급하며 ‘차 대감’ 호칭 들어
[아시아엔=드라마 ‘올인’ 실제주인공, 강원관광대 명예교수, <블랙잭 이길 수 있다> 저자] 나는 평소 장래가 있는 프로기사가 바둑판 앞에 앉아만 있는 것보다는 넓은 세상을 여행해 보는 게 바둑실력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넓은 세상을 본 사람은 생각 범위가 더 커지고 넓어지기 때문이다. 자녀들과 여행 가는 것은 어떤 교육보다도 스케일을 키워주는데 무척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많은 프로기사들에게 미국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동안 나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기사가 60-70명 정도 된다. 기자단과 바둑 관계자까지 합치면 100명은 족히 될 것이다.
미국의 바둑보급에도 도움이 되는 ‘도전기’(挑戰杞)를 미국에서 여러 번 개최하였다. 조훈현 왕위에게 유창혁 9단이 도전자가 되어 미국에서 왕위전을 개최한 적이 있다.
이창호 9단도 14살때 일행이 되어 다른 기사들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창호는 캐나다까지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 스승인 조훈현을 상대로 타이틀을 하나씩 따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큰 세상을 보고 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바둑의 안목도 넓어진다.
나는 1976년 미국에 처음 도착하여 리버사이드란 곳에 정착하였다. LA 하고는 1시간 40분 정도 떨어져 있어 바둑 두러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LA는 가끔씩 시장을 볼 때 한참 운전하여 가야하는 곳이었다. 한번은 ‘기원’이라고 쓰인 간판을 보고 집사람이 장을 보는 동안 잠깐 들어가 보았다. 얼굴에 수염이 많이 난 아저씨가 반갑게 맞아주며 자신은 6단을 두는데 몇 급을 두느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백통을 가져간다.
나는 백통을 다시 빼앗아오며 3점을 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다시 백통을 가져가며 자기가 6급이 아니고 6단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LA에는 그의 적수가 별로 없었다. 나는 다시 백통을 가져오며 “나도 아마추어 때는 6단을 두었지요”라고 했다.
그가 “미국에서는 프로가 없는데 누구시냐”고 묻는다.
내가 “한국에서 갓 이민 온 프로기사”라고 하니 놓기 싫은 3점을 억지로 놓고서야 바둑이 시작되었다. 그의 이름은 최건호씨다.
프로와 처음으로 대국을 하는지라 프로의 깊이를 알 리가 없는 그는 내 돌을 마구잡이로 잡으려고만 했다.
한판의 바둑이 거의 다 죽어갈 무렵 김효명씨가 들어왔다. 김효명씨는 한국기원 원생 출신이라 나를 금방 알아보고 “차 사범님” 한다. 나 하고 바둑을 두고 있는 최건호씨와는 친구 사이라고 한다. 김씨는 “네가 3점으로 되니?” 하며 최건호를 나무란다.
최건호는 한국에서 미국을 방문한 프로기사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바둑 팬이다. 한국에서 미주를 방문하는 기사들은 모두 그의 신세를 지곤 하였다. 이렇게 LA 교민들과의 첫번째 대면이 이루어졌다.
리처드 도랜이라는 남가주대(USC) 물리학 박사는 아마추어 5단으로 바둑광이다. 리처드는 프로기사가 미국에 정착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으로 나를 수소문한 끝에 일본기원에서 마침내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교환교수로 일한 적이 있어 일본어를 아주 잘했다. 아니 천재인데다가 어학 소질도 있었다.
한번은 한국에 갈 수 있느냐고 사흘 전에 이야기하였는데 한국 가는 비행기에서 잡지에 있는 한글을 주섬주섬 읽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천재란 바로 그런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의반 타의반 미주전역을 돌아다니는 사범이 되어 바둑 보급을 하게 되었다.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뉴저지, 뉴욕, 덴버, 휴스턴, 디트로이트, 볼티모어, 토론토, 밴쿠버, 위니펙, 뉴멕시코, 멕시코시티, 아바쿠키, 필라델피아, 칸쿤, 샌디에고 등등···.
그야말로 너무 많은 곳을 다녀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바둑 팬이 있는 곳은 북미주뿐 아니라 남미까지 모조리 다녔다.
LA에는 식당을 운영하며 ‘김 대감’으로 불리는 최고 고수 한분이 계셨다. 첫날은 3점을 접고 한판의 바둑을 두었는데 내가 1집을 졌다.
모양으로 보아서는 틀림없이 3점 바둑인데 잔수가 워낙 세서 만만치가 않았다. 다음 주에 다시 두게 되었는데 2점만 놓겠다는 것이다. 2점은 안될 것이라고 3점을 놓으라고 했지만 그는 한사코 사양한다. 내기의 경우는 더 놓기를 원하는데 ‘김 대감’만은 정반대였다.
20판을 넘게 이겼는데 끝끝내 거부한다. 이분이 그 동안 LA기원의 재정을 다 도와준 분이라고 한다. 나는 이긴 돈을 다시 다 돌려주고 나오는데 그는 돈을 받지 않겠다한다. 그리고 다음 주에 다시 두게 되었다. 결과는 마찬가지. 또 돌려 드렸으나 받지 않는다.
다음 주에는 자신이 꼭 이겨 보이겠다고 하면서···. 5주 연속으로 이기면서 칫수는 다시 3점으로 올라갔고 6주째가 되었다. 다시 바둑을 두러갔더니 그는 나에게 “대감님” 하면서 항복을 한다.
내가 팔자에 없는 ‘차 대감’ 칭호를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