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 인생 차민수 27] ‘영원한 형님’ 김인 국수와의 추억

80년대 중반 김인 국수(왼쪽)

[아시아엔=차민수 드라마 ‘올인’ 실제 주인공, 강원관광대 명예교수, <블랙잭 이길 수 있다> 저자] 내가 김인 9단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때이다. 한국기원에 프로와의 지도대국을 신청해 놓고 기다리니 신인왕인 유건재 사범이 나오셨다.

지도기를 받고 있는데 김인 국수께서 들어오셔서 구경을 하신다. 당시 8단으로 조남철 선생님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분이었고 너무나 좋아 하는 팬이었다.

당시에는 “바둑에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조남철에게 물어봐라” 할 정도로 조 선생님은 한국 바둑계의 신 같은 존재였다. 대학시절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조 선생님의 댁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

바둑서적이 귀할 때도 선생님 댁에는 기도 잡지를 비롯하여 우리가 구하기 힘든 책들이 많았다. 일본으로 시합을 하러 갈 때는 단장으로 모시고 가기도 했다.

일본서 한일친선 대학생 시합 때의 일이다. 일본선수는 2시간반의 시간을 다 사용하고 마지막 초읽기에 몰리고 있었다. 일본의 단장 선생께서 와 보고는 심판에게 시계가 고장 난 것 같다고 한다. 나의 시계는 겨우 5분을 지나가고 있었다.

조 선생님께서 이 친구가 한국에서 가장 빠른 속기의 달인이라고 설명하자 다들 놀란다. 5분을 사용하고 바둑도 내가 이겨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나는 김인 국수님은 이렇게 대면을 하게 되었다.

김인 국수께서는 인품이 훌륭하기로도 소문이 나 있었다. 기사들이 승단 판에 김 국수님을 만나면 “승단 판입니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일부러 져주신다. 자신이 승단이 안 되는데도 그냥 져 주신다. 당시에는 기사 중에서 김 국수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사가 바둑 한판을 남에게 져 준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다. 나는 가까이 지내면서 사람의 도리와 의리 그리고 처신을 배웠다. 나는 그런 그를 존경하여 형님처럼 모셨고 나를 아우처럼 여겨 주셨다.

세계의 여러 곳으로 해외여행도 참 많이 모시고 다녔다. 콜로라도주 해발 1600m에 위치한 덴버시에 바둑행사인 다면기를 두기 위해 김인 국수님을 모시고 간 적이 있었다. 대국 후 만찬을 마치고 덴버에만 있는 곳이라며 스트립클럽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처음 보는 스트립클럽은 다른 곳과는 과연 다른 면이 있었다. 한곳의 여성 스트립퍼가 옷을 벗고 있었고 두번째 무대에서는 남성 스트립퍼가 옷을 벗고 있었다. 여성들의 괴성소리가 어찌나 큰지 클럽을 가득히 메우고 있다.

세번째의 무대가 있었는데 아마추어의 무대였다. 클럽에 놀러 온 손님 중에서 벗고 싶은 손님들이 올라가서 벗는 곳이었다. 우리네 상식으로는 창피하게 누가 올라가 옷을 벗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꼭 그렇지가 않았다.

무대는 세 사람 정도가 올라가 옷을 벗고 춤을 추고 있었으며 무대가 좁아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은 무대 아래서 여기저기 옷을 벗고 있었다.

김 국수님과 나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한국기원의 종로시절에는 낭만이 있었다. 기사실에서는 내가 막내라 담배 심부름이나 차 시킬 때면 유전다방까지 내려가 차 배달을 시키고 얼른 돌아와 선배님들의 바둑구경에 삼매경에 빠지곤 하였다.

김정학 사장님, 정창영 선배님, 고재희 사범님, 안영이 선생님, 오수전 회장님, 이준학 선배님, 조훈현 국수, 박치문 위원, 한상열 사범, 수많은 기사들과 아마추어 팬들이 같이 몰려다니며 어울렸다.

지금은 많은 분이 이미 고인이 되셨다.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 다들 축하해주며 섭섭해 하였다. 약방의 감초였던 ‘구루마’가 없으면 무언가 빠진 것 같기 때문이었을까? 선배님들은 나를 구루마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