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냥이아빠의 일본 엔타메] 믿음과 불신 그리고 ‘분노’

[아시아엔=박호경 기자] 지난 금요일 밤, 일본을 상징하는 여배우 중 한명인 미야자키 아오이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영화 <분노>와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두 편을 놓고 고심했다. 한 작품은 파격적인 소재의 심리스릴러물, 또 다른 작품은 잔잔한 영화. <분노>는 보고 나면 왠지 마음이 불편해 질것만 같아 보기가 꺼려지는 영화였지만, 그 날 따라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이 작품이 먼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불편해진다는 표현으로 모자라 주말 내내 내 머릿속은 ‘분노’에 잠식당해 버렸지만, 영화 <분노>에도 잠식된 필자는 이 작품을 한번 더 보는 고통을 감수했다.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분노>는 독자들에게 굳이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아님을 말씀 드리고 싶다. 이 작품을 기존의 밝은 문체로 표현하는 것도 어려워, 영화의 분위기처럼 건조한 문체로 글을 풀어갈 것이다. 또한 이 글에는 필자의 자전적인 내용도 포함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밝힌다.

영화 ‘분노’ 포스터

재일교포 이상일 감독의 영화 <분노>는 올해 3월 열린 제40회 일본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최다 13개의 상을 휩쓴 작품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됐던 작품이다. 요시다 슈이치 작가의 신문연재 소설을 각색한 <분노>는 이상일 감독의 전작 <악인>이 그러했듯, 이 작품 역시 전형적인 일본영화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오히려 한국의 나홍진 감독과 박찬욱 감독을 섞어 놓은 듯, 드라이하지만 영화 전반을 휘어 감싸는 스산한 분위기가 풍겨 나온다. 여기에 사카모토 류이치의 절제됐지만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음산한 사운드가 얹어지며 보는 이를 긴장케 한다.

동성애, 성폭행 등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이 영화는 겉으로는 심리스릴러물을 표방하나, 이는 단순한 트릭에 불과하다. <분노>는 믿음, 불신, 분노라는 원초적인 감정 앞에 초라해지는 인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필자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 가겠다.

뜨거운 여름날의 오후, 도쿄의 평화로운 마을 하치오지에서 결혼 7년차의 부부가 처참하게 살해당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怒’(분노) 글자만을 하나 남겨둔 채 용의자는 사라지지만, 1년이 지나도록 잡히지 않아 공개수배 명단에 오른다

영화는 장소를 바꿔 도쿄의 가부기초를 비춘다. 거리를 헤매는 한 남자(와타나베 켄 분).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받아 한 풍속점에 들어간다. 집 나간 딸을 찾는 듯 하다. 3개월 만에 찾은 딸 아이코(미야자키 아오이 분)는 몸도 마음도 망가져 있는 상태. 치바의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부녀는 서로를 살뜰히 챙긴다. 미묘한 어긋남이 보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여느 부녀와 똑같다. 치바 항구의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한 남자(마츠야마 켄이치)가 보인다. 딸은 그 남자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다.

동성애 연기를 펼친 아야노 고(왼쪽)와 츠마부키 사토시

도쿄 신주쿠 게이 거리를 걷고 있는 두 남자. 이들은 관계를 맺은 후 서로에 이끌려 동거를 시작한 사이다. 섹시하고 유능한 이미지의 남자 유마(츠마부키 사토시 분)는 자신이 게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보이며 당당하다. 번듯한 직장과 좋은 빌라에서 윤택하게 생활하는 그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연약해 보이는 남자 나오토(아야노 고 분)에 점점 빠져들어 사랑을 느낀다.

히로세 스즈(왼쪽)와 모리야마 미라이

오키나와 바다를 달리는 조그마한 보트. 고교생으로 보이는 소녀(히로세 스즈)와 소년이 탄 보트가 무인도에 도착한다. 남학생은 모래사장에서 낮잠을 청한다. 여학생은 무인도를 혼자 구경하던 중 쓰러져 가는 건물 더미에서 배낭여행족으로 보이는 의문의 한 남자(모리야마 미라이)를 만난다.

치바, 도쿄, 오키나와 세 곳을 무대로 펼쳐지는 영화는 세 개의 에피소드를 교차로 풀어 나간다. 각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세 명의 ‘알 수 없는’ 남자들은 모두 하치오지 살인사건의 용의자와 많이 닮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확한 신원을 밝히지 않고 저마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에겐 각각 사랑하는 여자와 그녀의 아버지, 사랑하는 남자, 믿음을 주는 아이들이 생긴다. 극은 중반부까지 이들에게 싹트는 사랑과 믿음을 보여준다. 이에 흡입된 관객들은 세 남자에게 애틋한 감정마저 느낀다.

이들은 블록을 쌓듯 사랑과 믿음을 차곡차곡 쌓아가지만, 어느 순간 블록의 틈새 사이로 ‘의문’이란 불청객이 불쑥 튀어나온다. 이윽고 극이 종반부로 향하면서 믿음의 블록은 한 순간에 허물어져 버린다. 블록이 허물어진 후 밝혀지는 진실은 감당하기에 너무나 가혹해, 이들은 오열하고 분노한다.

“삼촌 혹시… 삼촌 딸이 행복해질리 없다고 생각하는거 아냐?”
종반부 파국의 시작점을 알리는 한마디다. 치바 항구로 돌아온 미야자키 아오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몸 팔던 여자’로 낙인 찍혀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고 믿지만, 그런 차가운 시선 속에서 딸을 지킬 수 없다. 오히려 딸의 믿음을 저버리고 ‘보통의 여자들과는 다른’ 자신의 딸이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아버지는 그런 속 마음을 조카에게 들켜버리고 만다.

이 장면과 대사는 영화 속 아버지의 마음뿐만 아니라 필자의 폐부도 찔렀다. 필자에겐 정신분열증을 오랜 기간 앓고 있는 친누님이 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상태이지만, 1년에 한 두 번씩 집을 나가기도 한다. 필자도 영화 속 아버지처럼 누나를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맨 적이 부지기수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영화 속 대사를 듣고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어 하는 필자 또한 영화 속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아플 뿐이다.

미야자키 아오이(왼쪽)와 마츠야마 켄이치

영화가 종반부에 치달으면서 감정의 곡선은 더욱 격해진다. 진실과 맞닥뜨린 아이코가 오열하는 장면에선 대사가 묵음처리 된 채 절망스러운 음악만이 흐른다. 사랑하는 이를 끝내 믿지 못했다는 자괴감은 그녀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긴다.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에도 절망과 괴로움만이 남는다. 비록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지만, 이 장면은 가슴을 후벼 파는 가장 잔혹한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종반부 내내 요동치는 감정은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심연으로 몰고 간다. 그러나 영화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헤쳐나갈 키잡이를 배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인셉션> <라스트 사무라이> 등에 출연한 일본의 대표 중년배우 와타나베 켄은 미야자키 아오이의 폭발하는 분노를 삭히고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는 아버지 역할로 극의 중심을 잡아준다. 와타나베 켄 이외에도 동성애자 역할을 맡아 강도 높은 베드신을 소화한 츠마부키 사토시와 아야노 고를 비롯해 히로세 스즈, 모리야마 미라이, 마츠야마 켄이치 등 일본 최고의 배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열연을 펼치며 영화 속 캐릭터에 생동감을 불어 넣는다.

동양인 최초로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음악감독 사카모토 류이치 역시 관객의 심장을 들었다 놓는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멜로디는 항상 동일하다. 다만 상황에 따라 다른 악기, 다른 리듬에 맞춰 흐를 뿐이다.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동일한 멜로디는 관객들로 하여금 ‘누가 범인일까’하는 궁금증을 더욱 고조시킨다. 그리고 클라이막스에 도달하는 순간, 그동안 억눌려 있던 선율은 한 순간에 폭발해 관객에 그 충격을 전한다.

“정말 소중한 건 늘어나는게 아니라 줄어드는거야”
영화 종반부의 빼놓을 수 없는 대사다. 묘령의 여인(타카하타 미츠키 분)은 사랑하는 이를 믿지 못하고 도망친 자신에게 분노하는 유마에게 나오토의 메시지를 전한다. 오열하는 유마와 마주하지만 감정을 절제한 그녀는 “진정하세요” 한마디로 파국의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이윽고 진정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떠올린다. 단 한번의 의심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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