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⑦] 그리고 ‘실패’···백리해는 떠나고, 진 목공 죽다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세월은 인간을 흐리게 만들고, 고목나무처럼 안에서 썩어가게 하는가? 진목공이 말년에 이르러 무리하게 대국 정(鄭)나라를 치려하니, 백리해가 이를 말린다.
거듭된 나라의 전란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너무 크고, 결국 나라의 안위가 위태로워진다는 충심으로 간언한다. 그러나 사람이 나이 들면 주위의 진언을 무시하고 자기고집만 부리게 되고 자아도취에 빠지게 된다. 나이든 사람들은 이를 꼭 경계해야 한다.
진목공도 예외는 아니어서 충신의 말도 듣지 않고 강하게 자기고집을 부린다. 백리해와 건숙은 드디어 때가 왔음을 알고 즉시 목공을 알현하여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했다.
목공이 허락하고 즉시 요여(繇余)와 공손지(公孫枝)를 각각 건숙과 백리해가 맡고 있었던 좌우상경에 명했다. 백리해는 건숙과 함께 명록촌으로 들어갔다. 그때 백리해는 백 살이 넘은 나이였다.
사가들은 말한다. 백리해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동으로는 정나라를 쳤고, 진(晉)나라의 군주를 세 번씩이나 교체시켰으며, 초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백리해가 어진 정치를 베푸니 오랑캐까지 복종해 따랐다. 백리해는 재상을 지내면서 아무리 피곤해도 수레에 앉지 않았고, 더워도 수레 덮개를 씌우지 않았다. 백리해가 행차할 때는 수행하는 수레를 거느리지 않고 무장한 갑병(甲兵)도 없었다.
백리해의 공로는 너무 많아 문서창고에 기록되어 보존되어 있으며, 덕행은 후세까지 전해지고 있다. 백리해가 죽자 진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고, 아이들조차 노래를 하지 않았으며, 방아를 찧는 사람들도 흥얼거리지 않았다. 이것이 백리해의 정치요 덕이다.
재위 39년만인 기원전 621년 진나라 9대왕 명군주 진목공도 죽었다. 그러나 진나라가 오랑캐 나라임이 이때 여실히 드러난다. 아무리 신분세탁을 해도 본색은 못 속인다.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진의 순장제도를 말한다. 그를 장사 지낼 때 같이 순장되어 죽은 섬진국의 훌륭한 신하들이 177명에 달했다.
그때 섬진의 현자로 이름이 있어 삼량(三良)이라고 불렸던 세 사람의 자거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나라 백성들이 이를 슬퍼하여 ‘황조가’(黃鳥歌)라는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 물론 이것은 기원전 1세기 때 고구려 2대 유리왕이 부른 서정시 황조가와는 다른 것이다.
군자가 말하기를 진목공이 맹주가 되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죽을 때 백성 중의 가장 귀중한 존재인 유능한 인재들을 빼앗아갔다. 선왕이 세상을 떠날 때는 오히려 아름다운 법도를 남겼고, 착한 말을 지어서 뒷사람을 경계하고 도량형과 법도가 있었다. 모든 일에 표준을 마련하고, 법률과 제도를 마련하고 선왕의 경전(經傳)을 가르쳤다.
악을 방지하고, 이를 일으키는 일로써 인도하고 직책을 각기 유사(有司)에게 맡겼으며, 예의로써 가르쳤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이 어진 인재를 빼앗는 일을 하였는가?’
진 목공은 도대체 아름다운 법도를 만들어 후사에게 남겨주지는 못할 망정, 어찌 어진 인재를 거두어서 따라 죽게 한단 말인가? 그렇게 하고서는 절대 남의 위에 설 수 없는 법이다. 군자는 이런 까닭으로 진나라가 다시 동쪽을 칠 수 없는 이유를 알았다.
사가들은 이렇게 혹독하게 진 목공을 비판했다. 또한 실제로 그의 찬란한 업적은 그의 순장으로 모두 헛되게 되어버렸다. 아아 통재라!
진나라는 이후로도 순장이라는 행위를 떳떳하게 행했다. 비록 목공이 살아생전에 어진 마음으로 정치를 행했다고 할지라도 그 잘못은 면할 수 없었다.
군주가 명을 함부로 발하여 살인을 꺼리지 않았음에도, 그 그릇된 줄을 알지 못했다. 후에 진시황(秦始皇)을 장사할 적에 후궁들과 신하들을 산채로 묘 안에 매장한 짓과 어마어마한 병마총은 모두 목공과 진의 못된 풍습으로 기인했다.
후세의 군자(君子)들도 이 일을 두고 말했다.
“진목공이 영토를 넓히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힘써 동쪽으로는 강국인 당진을 굴복시키고, 서쪽으로는 서융을 정벌하여 패자가 되었으나, 중원의 제후들의 맹주까지는 이를 수 없었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가 죽음에 임해 그의 어진 신하들을 모두 거두어 같이 순사시켰다.”
역사서 <춘추좌전>에 이르기를, 목공은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되기를 바라며 도덕과 법도를 물려준 선왕들의 본을 받지 않고, 오히려 착하고 어진 신하들을 빼앗아 가서 백성들로 하여금 슬퍼하게 만드니 이것 때문에 섬진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맹주가 되지 못했다. 이후 진나라는 다시금 변방의 소국으로 전락했다‘
사실 진 목공으로 말하면, 그가 이룬 업적은 엄청나서 서북방 오랑캐 나라 진나라를 중국 본토의 정통 제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공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또한 진나라가 중원의 기라성 같은 강대국들을 물리치고 천하통일을 이루는 초석을 올려놓았다고 평가받는 이유가 그것이다.
기원전 7세기에 이런 군주가 나타났다는 것은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알고 모르고 이야기하는 수많은 중국 고사의 주인공이 바로 진 목공이다.
진나라가 다시 용트림을 하기 위해서는 몇 세대를 기다려야 했다. 이제부터 서론을 마치고 본격적인 진나라의 통일과정을 펼치고자 한다. 저 빛나는 상앙의 법치주의, 귀곡 선생, 종횡가 소진과 장의의 합종연횡책, 중국 최초의 비극의 시인 굴원의 어부사, 범저의 원교근공책, 완벽귀조(完璧歸趙)와 문경지교(刎頸之交) 이야기, 세계 戰史상 가장 참혹한 장평천하대전, 기전파목용군최정(起?頗牧 用軍最精)의 사대천왕, 여불위, 이사, 한비자, 몽염 등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드디어 진시황과 천하통일 이야기는 장강의 물결처럼 한도 끝도 없이 장대하게 흘러간다.(1부 끝, 2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