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⑨] 진 상앙의 변법은 모택동·시진핑의 롤모델

나라는 백성을 결코 속이지 않는다

[아시아엔=강철근 중국전문가] 진나라 대부 상앙이 궁의 남쪽 문에 여섯 자 길이의 높은 장대를 세우고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이 장대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황금 열 덩이를 상으로 주겠노라!” 그러나 백성들은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두려워하며, 저것들이 무슨 꿍꿍인가 싶어 그러나 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상앙은 상금을 황금 오십 덩이로 올렸다.

이에 용감한 어느 청년이 죽기를 각오하고 장대를 북문으로 옮겨버렸다. 이때 상앙은 그 자리에서 황금 오십 덩이를 상으로 주고는, “나라는 백성을 결코 속이지 않는다” 하였다. 법률을 만든 상앙은 그것을 널리 발표하기 전에 우선 백성들에게 “법령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정부의 굳센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로마법의 기본인 “약속은 지켜야 한다”(pacta sund servanda)와 같은 말이다.

이제 상앙은 본격적으로 법가적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한다. 효공은 제왕의 도와 왕도를 과대망상으로 치부했다. 그에게 제왕지도나 왕도는 너무 지루하고 멀었다. 도대체 지름길을 놔두고 왜 먼 길을 에둘러 가는가?

그는 상앙의 세 번째 말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변법을 선호했다. 백성들이 확실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다. 그것이 변법이었다.

변법이란 개혁이다. 개혁도 부분 개혁이 아닌 사회 전체 시스템의 개혁이다. 상앙의 변법은 당시 진나라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어 새판을 짜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철저한 개혁을 통해 진의 천하 통일의 토대를 마련한다. 이런 법가의 현실주의는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정신이었다. 상앙의 법가주의와 변법은 오늘날 그대로 적용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제도다.

이때 상앙이 효공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진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먼저 낡은 법률과 제도부터 개혁해야 합니다. 그리고 농업 장려로 백성을 배부르게 해 나라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상앙은 진 효공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대대적인 변법 즉 개혁정책을 실시한다. 그는 군사, 재정, 법제, 토지, 관리체계 등 진나라의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계획해 이를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이때 상앙이 만든 법의 내용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여, 그 시행방법으로 엄벌주의, 연좌제(連坐制), 밀고의 장려, 신상필벌(信賞必罰) 등 법률지상주의였다. 모든 사항을 법으로 세밀하게 규정하여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르기까지 법률의 적용을 받게 했던 것이다.

1차 변법은 기원전 359년부터 실시됐다. 상앙은 진나라의 모든 가구를 5가구의 단위로 정리했다. 그리고 이 단위별로 세금과 병역의 의무를 부과했다. 또한 이 단위 가구에서 범죄가 발생했는데도 고발을 안 하면 연좌제로 엄하게 처벌했다. 물론 포상도 단위 가구에 똑같이 시행했다. 이는 훗날 오가작통법으로 발전했다. 이 고발제도를 통해 상앙은 진나라의 모든 백성을 실질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또한 등급제를 실시했다. 위로는 귀족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 모두에게 총 20등급의 작위를 부여했다. 작위에 따라 옷, 집, 생활 등 모든 실생활과 명예까지 차등을 두었다. 작위 등급은 철저하게 공로의 유무와 대소를 따져 부여했다. 공을 세우면 작위를 주었고 공이 없으면 귀족이라도 작위를 박탈했다.

이로 인해 자연히 백성들은 전쟁에 참전하거나 농업생산량을 늘리는 방법 으로 작위를 받았다. 약 10년간의 개혁정치를 통해 자신감이 붙은 상앙은 2차 변법을 시행했다. 전국을 31개현으로 통합했다. 그리고 현에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강력한 중앙집권제인 군현제를 구축했다. 오늘날까지 중국의 전통으로 굳어진 군현제가 이때부터 시행되었다. 또한 상앙은 노예제의 부분적 폐지를 주장했다.

노예를 과세와 병역의무가 있는 良人으로 신분을 전환시켜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의 전란 속에서 양반들의 발호를 막고 부국강병의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전시 재상 유성룡이 수입하여 실시하고자 했던 세제와 병역개혁의 모델이 된다.

이러한 제도개혁을 통해 상앙은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했고, 토지개혁과 도량형 통일 등으로 진나라의 국력을 눈부시게 신장시켰다. 상앙의 변법은 진나라를 변방의 작은 국가에서 급속도로 전국시대의 강자로 변모케 했다. 상앙이 진나라 효공의 오랜 숙원인 부국강병의 진나라로 만든 것이다.

史家들은 말한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의 기틀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현대 중국의 모택동과 시진핑 등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상앙을 존경하고 사숙했다. 춘추전국시대의 몇 안 되는 명재상이 진나라에서만 벌써 두 번째다.

상앙의 새로운 법령이 시행된 지 10년이 지나자, 진나라는 점점 체계가 잡혀갔다. 도둑질은 물론 길에서 남의 물건을 주워 가져가는 사람도 없었고, 산에서 땔감을 마구 베어 가는 사람도 없어졌으며, 개인끼리의 싸움은 되도록 서로 피하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전쟁에서는 모두 용감했다. 진은 점점 부강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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