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⑧] 진 효공, 상앙의 ‘변법’으로 천하통일 기틀 마련

상앙(商鞅)

법은 승리를 위한 수단이다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진의 9대왕 목공 이후 진나라는 오랫동안 간신히 명맥을 이어 내려왔다. 무섭고도 긴 침묵의 시간이었다. 인재는 다 사라지고, 영명했던 진목공의 신화도 잊혀졌다. 진의 무지막지한 전통의 순장제도로 인한 177명의 인재가 함께 파묻힌 사건의 후유증은 엄청났다. 진은 다시 서북방의 무식한 변방국가로 남아있었다. 중원의 정통 제후국들은 진을 다시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길고도 긴 굴욕의 세월이었다.

진이 다시 중원 제국 속에 얼굴을 들기 시작한 것은 정확하게 300년 후인 25대왕 진효공(秦孝公 재위 기원전 361~338년)때부터였다. 그나마 그 앞의 24대 진헌공은 진나라의 발전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순장제도를 폐지했다. 그것만으로도 큰 업적이었다. 아무도 하지 못했던 개혁을 이룩한 것이다.

이제 서서히 진나라에 새로운 기운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새나라 창업에 버금가는 새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새로운 인재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무한경쟁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이상과 경륜을 가진 인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깐, 가장 뜨거운 문제이며,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대선을 앞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은 국정철학과 이념의 문제이다. 우리는

춘추전국시대의 대세는 당연 유가의 ‘인의예지’라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여기에 춘추전국시대의 묘미가 있다. 제자백가의 수많은 철학적 변설들은 끝이 없었다. 시끄러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유가는 인의도덕을, 도가는 무위자연, 묵가는 겸애사상을 제창했으나 세태는 오히려 혼미만 거듭했다.

이 시대는 생존의 시대였다. 중요한 것은 남보다 강한 것이지 남보다 도덕적인 것이 아니었다. 춘추전국시대 말기의 대표적 법가사상가인 한비자가 유가의 학설을 비판하기를, “유교정신은 나라를 보전하고 다스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대신 꼭 필요한 나라의 부국강병을 주창한 학파가 바로 법가다. 법가주의자들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법가 사상을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정신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들은 부국강병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극단적인 수단도 가리지 않았으며, 왕도정치를 주장한 맹자가 그토록 공격한 패도정치(覇道政治, 힘에 의한 정의를 이루는 정치)가 바로 그들의 이상이었다.

여기서는 앞으로 유가의 인의예지와 법가의 부국강병을 수시로 비교 검토할 것이다.

위대한 개혁정치가 상앙이 등장하는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 관중의 적통을 잇는 사람이었다. 춘추시대 대표적인 제후국 제나라의 중흥을 이룩했던 관중의 법가사상에 입각하여 법치정신을 강조한 상앙은 법가의 계통을 잇는 전국시대의 정치가다. 본래 이름이 공손앙이었던 상앙은 위나라 왕의 첩에게서 태어났다. 그가 나중에 진나라에 등용되어 상(商)이라는 곳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후 상앙이라 불리게 되었다.

사실 상앙의 그 독하고 비정한 엄벌주의는 물론 법가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지만 동시에 첩의 자식이라는 자의식과 열등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처음에 그는 위나라의 재상 공숙좌(公叔座)의 가신(家臣)으로 머물러 있었는데, 좀처럼 벼슬길이 열리지 않았다. 이에 공손앙의 뛰어난 재능을 잘 알고 있는 공숙좌는 그를 혜왕에게 천거했다. 하지만 혜왕은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숙좌가 죽기 얼마 전, 병문안을 온 혜왕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소신이 죽거든 제발 공손앙을 등용하십시오. 만일 정히 등용하지 않으시려거든 그를 차라리 죽여 없애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왕에게 한 말을 공손앙에게 그대로 전하고는, 빨리 도망치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공손앙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재상의 천거가 있었음에도 저를 쓰지 않은 사람이 어찌 저를 죽이겠습니까?”

이때 혜왕은 사람들에게 말하길, “똑똑하던 공숙좌가 죽을 때가 되니 정신이 좀 이상하게 되었다. 별 볼일 없는 공손앙을 한번은 중히 쓰라하더니, 또 한번은 죽이라 하니 그 친구가 영 못쓰게 됐다.” 과연 혜왕은 공손앙을 죽이지 않았다.

한편 진나라는 9대왕 목공 사후 하늘의 도움으로 영명한 군주가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그가 진나라 25대왕 효공(孝公)이다. 그는 야심찬 인물로서 과거의 위대했던 할아버지 목공의 전성시대를 다시 구현코자 했다. 가장 시급한 일이 널리 인재를 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앙은 위나라 왕이 자신을 등용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인재를 간절하게 구하고 있는 서쪽 진나라로 갔다. 진나라로 간 상앙은 면담신청을 하고 진 효공의 답을 기다렸지만 당연 답이 없었다. 상앙은 효공의 중신 경감과 간신히 선을 대고는 한참 후에 효공과 대면할 수 있었다.

상앙이 처음 유가의 제왕지도(帝王之道)로 유세하자, 효공은 상앙을 소개한 경감에게 “당신의 빈객은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아닌가?”라며 화를 낸다.

두 번째 만남에서, 왕도(王道)로 유세한다. 그래도 효공의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마지막으로 상앙이 패자지도를 이야기하자, 효공은 대부에게 “당신의 빈객은 괜찮은 사람이오. 그와 더불어 이야기할 만하오”라고 했다. 이 세번의 유세를 통해 상앙은 효공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상앙은 효공을 만나 본격적으로 법가의 부국강병책을 말하는데, 효공은 정신없이 상앙의 변설에 빠진다.

상앙은 그의 책 <상군서>에서 유가의 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멋지게 비판한다.

“어진 사람은 모든 사람을 어질게 대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을 어질게 만들지는 못하고, 의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도록 만들지는 못한다. 인과 의만으로 천하를 다스리기에는 부족하다.”

이 말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며, 유가와 법가를 비교하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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