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⑪] ‘법가 원조’ 상앙의 비참한 최후 보며 검사 우병우를 떠올리다

상앙(왼쪽)과 우병우

백성보다 군주 치적 만들기 앞장선 자의 최후 “자신의 법에 의해 자신의 사지 찢기다”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상앙은 거칠 것이 없었다. 진 효공의 전폭적인 신임으로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당연히 모든 세력으로부터 견제받게 된다. 기득권자들인 왕족, 귀족들은 별 볼 일 없는 서출이며 외국인인 상앙의 출세에 분노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상앙의 엄격한 법집행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상앙의 너무도 엄격한 법의 시행으로 매년 수십만의 죄수들이 생겼으며, 매일 처형되는 사형수는 600명에 달하였으며, 그들이 참혹하게 흘린 피로 진나라의 큰 강 위수는 언제나 붉게 물들었다. 전한(前漢)시대, 즉 기원전 100여 년쯤의 역사가이며, 정론의 사가 사마천(司馬遷)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사기>(史記) ‘상군열전’에 이르길, “상앙은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잔인한 정치가”였다고 모질게 평가했다.

상앙은 왜 이렇게 거칠고 모난 성격을 가지게 되었을까? 권력자의 출신성분은 나라와 백성들에게 중요하다. 그는 귀족 가문 출신이지만 어머니는 첩이었다. 때문에 상앙은 평생 첩의 아들이라는 ‘서자 콤플렉스’에 매몰되어 있었다.

태생적 한계 속에서 상앙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출세하려는 욕망이 강했다. 그는 또한 남을 믿지 못하고 모나고 거친 성품을 갖게 되었다. 스스로 마음이 불안해진 상앙이 올곧은 선비 조량을 만나 물었다.

“내가 지금 진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조언 좀 해주게나.”

“일개 백면서생인 저의 의견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대의 말은 신뢰가 있으니 사양치 말고 말해주게나. 내가 재상이 되어 많은 일을 했는데, 옛날 목공 때의 명재상 백리해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어떤가?”

“백리해는 현명하고 어진 재상입니다. 백성들은 모두 그를 신뢰했습니다. 그가 죽자 백성들 중에서 울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에 비해 공께서는 백리해와 크게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공은 백성을 위한 정치보다는 군주의 치적 만들기에 우선했습니다. 그것이 제일 크고, 또한 공에게는 공이 만든 법으로 피해를 당한 많은 원망이 쌓여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왕보다 공을 더 무서워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그러면 내가 앞으로 어찌 해야 하겠는가?”

“이 시간 이후 그동안 하사받은 모든 봉토와 모아놓은 재산을 전부 헌납하고, 낙향하십시오. 덕을 쌓아야 합니다. 지금처럼 국정을 장악하고 힘을 과시한다면 장차 효공 사후에 그 많은 보복을 어떻게 감당하려 하십니까?”

이 대화를 들으면, 얼마 전 어느 나라에서 벌어진 국정조사에서 완승을 거뒀다는 우병우가 떠오른다. 당대에 이뤄놓은 그 많은 재산에, 국정조사와 특검에서 당장은 이겼겠지만, 과연 이긴 것이 이긴 것일까? 상앙의 말로를 보면….

또 백성보다는 군주의 치적을 위한 정치의 폐해를 말하는 선비 조량의 용기있는 지적이 폐부를 찌른다. 아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모골이 선다.

하지만 역시!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조량의 간언에 불쾌해진 상앙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얼마 후 그토록 건장하던 효공이 갑자기 병을 앓다 죽는다.

태자가 전격적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26대 혜문왕이다. 진나라의 정가는 다가올 소용돌이에 바짝 긴장했다. 피비린내가 벌써부터 진동했다.

혜문왕은 태자 시절의 수모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은둔생활을 하던 스승 공자 건도 복귀했다. 공자 건은 복귀하자마자 거두절미 상앙을 반란죄로 고발한다. 상앙은 더 이상 진나라에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야반도주했다. 고향으로 가기 위해 국경에 도착했다. 하지만 성문은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상앙이 수문장에게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새벽이 되어야 문을 열 수 있다는 법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여관을 찾았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여행증이 없이는 투숙할 수 없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앙은 자신이 만든 법으로 인해 위험한 지경에 빠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법으로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는 뜻의 ‘작법자폐’(作法自斃)라는 고사성어를 만들어냈다.

상앙은 한탄했다. ‘아, 내가 만든 법의 폐해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구나.’

우여곡절 끝에 상앙은 위나라로 탈출했지만 위나라 역시 상앙을 반기지 않았다. 당연하였다. 그 옛날 그가 한 짓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었다. 상앙을 받아들이면 진나라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위나라는 오히려 그를 잡아 진나라로 보내려했다. 상앙은 자신의 봉토인 상 지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식솔과 양민, 노비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했다.

하지만 진나라는 자신의 변법으로 이미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상앙은 할 수 없이 인근의 작은 국가 정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상앙의 운은 여기까지였다.

그가 정나라로 가는 도중에 매복해있던 진 혜문왕의 군대에게 공격당해 처참하게 죽었다. 그들은 상앙의 시체를 수도인 함양으로 가지고 와서 사지를 찢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고 상앙의 삼족을 연좌제로 몰아 모두 몰살했다.

상앙은 등용된 지 21년만에 살해되었지만 그가 세운 엄한 법치주의와 부국강병책은 진나라가 한고조 유방과 초패왕 항우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계속되어 진나라의 통치수단이 되었다.

법치주의를 내세우고 나라를 부강하게 한 법가의 인물들은 풍운아 오기(吳起)를 비롯해서, 모두들 왜 이렇게 최후를 맞아야 했나? 후대의 한비자는? 진시황 때의 천하 명재상이자 법가의 최고봉 이사는 어땠을까? 그저 쓸쓸한 마음뿐이다. 인간사가 다 그런가? 법가의 운명인가?

이 문제는 나중에 성악설의 순자와 성선설의 맹자를 비교하면서 살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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