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 50] 진시황 통일제국의 ‘생성과 소멸’서 무얼 배울 것인가?

진시황의 통일 진나라<사진=위키피디아>

[아시아엔=강철근?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진시황제는 모든 일을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오직 자신과 진의 영광을 위해서다. 승상 이사 역시 자신의 온갖 능력을 다해 시황제를 도와 일했다. 결과적으로 이 또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진시황이 만들고자 했던 통일중국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원대한 구상은 무엇이었을까?

진시황제는 ‘말은 소리가 다르고, 문자는 모양이 다른’ 통일시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문자 통일을 먼저 추진하였다. 진나라 글자체인 소전체를 통일서체로 정했다.

진시황은 화폐개혁령을 공포해서 진 화폐인 반량(半兩)으로 통일하였다. 나아가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에 통일된 도량형 기구를 보급했다. 도량형이 가장 먼저 쉽게 통일되었다. 상거래를 위한 규격통일이었다.

그러나 문자의 통일은 쉽지 않았다. 서로 다른 문자와 말을 쓰던 사람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진 이외의 타국인들은 적지 않게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화폐의 통일은 환율 재조정 문제와도 같아서 진에 흡수된 6국의 상인이나 재산가들은 아무래도 재산평가액이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화폐통일은 사실 진시황제가 죽기 한해 전인 37년에 이루어졌는데,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분서의 문제는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결국 사상통일의 문제다. 순우월과 이사가 논쟁을 벌였는데, 그것은 요즘의 어느 나라처럼 헌법 개정 문제 특히 체제 개편의 문제였다. 이사는 강력한 중앙집권제와 이를 위한 군현제를 밀어붙이기를 주장했다. 반면 순우월은 과거처럼 봉건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천하통일이 이뤄진 지금 너무도 넓어진 중국을 중앙정부에서 왕이 혼자 다스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사는 자신이 밀어붙이는 체제를 비판하는 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즉각 진시황께 건의하여 이제 더 이상의 논쟁이나 비판은 필요 없다며 실용서적을 제외한 방대한 서적을 불 지른다. 진은 실제로 분서를 통해 각국의 문화와 역사를 말살하려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서적을 불태워 없애 진나라에 대한 정책비판의 이론적 근거를 없애고자 하였다. 이는 당연히 체제에 대한 비판이 금지된 것이다. 그리고 진 이외 다른 나라의 역사 모두를 부정한 것이기도 한다.

갱유사건은 술사(術士) 후생과 노생이 진시황을 비판하고 도망친 일에 대해서, 수도 함양 내의 모든 유생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여 약간만 문제가 있어도 잡아가둔 460여 명의 유생을 생매장해버린 사건이다. 진시황제의 큰아들 부소가 이에 대해 간언하다가 부친의 분노를 사서 몽염이 주둔하는 최전방으로 유배되었다.

이런 사건이야말로 진시황의 진수를 보여주는 폭군 전제정치의 극을 보여주는 사례로 진나라가 망한 가장 큰 이유로 거론되기도 한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의 자유 언론을 향유하던 유학자들이 이런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러한 분서갱유를 주도한 법가 이사는 두고두고 유학자들의 원한을 쌓게 되었다. 이렇게 한비와 이사 두 사람은 법가적 정치철학으로 인해 그 공에 비해 지나치게 폄하되고 말았다.

진시황제 38년 7월 천하를 순수하던 진시황제가 죽음을 맞이했는데, 진시황이 곧 진 제국을 상징하였기에, 그의 죽음은 곧 진 제국의 멸망이었다. 그동안 억눌리고 참았던 모든 세력들이 스프링처럼 일거에 튀어나오게 되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진시황제는 큰아들 부소에게 편지를 써서 함양으로 돌아와 장례를 주관하라고 명한다. 시황제의 죽음은 그를 호종하던 아들 호해, 환관 조고, 대신 이사 등 세 사람만 알고 있었다. 환관 조고는 문서를 위조하기로 마음먹고 호해를 설득하고 다시 이사를 설득한다. 이사는 결국 ‘하늘을 향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쉬며’ 복잡한 심경으로 음모에 참여한다. 조고는 마침내 위조된 유언을 부소에게 보낸다.

“부소는 아들 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고 효성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칼을 내리니 자결하라”고 했고, 더불어 수십만 대군을 지휘하던 몽염에게도 자결을 명한다. 몽염은 자결하려는 부소에게 황제의 뜻을 확인하고 결정하자고 설득한다. 그러나 착한 아들 부소는 자결해버린다. 결국 몽염은 사로잡히고 만다. 함양에 돌아와 시황제의 죽음을 발표한 호해는 2세 황제가 되었다. 이때가 진나라가 멸망 직전에 다다른 때이다.

승상 이사를 말하자면,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가 없다. 그 훌륭한 법가 사상가로서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을까?

사마천의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傳)에서는 이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사는 작은 마을의 미천한 몸으로서 제후를 유세하고 진(秦)에 들어가 진왕(秦王)의 신하가 되었다. 열국(列國)의 분쟁을 교묘히 이용하여 공작을 하고 진왕을 보좌하여 마침내 진왕으로 하여금 시황제(始皇帝)가 되게 하였고, 자신은 삼공(三公)이 되었다. 진실로 귀중하게 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사는 경전의 근본 뜻을 잘 알아 정치를 공평하게 하고 임금의 모자라는 점을 잘 보충하였으나, 높은 벼슬과 녹(祿)을 가지고서도 황제에게 아첨하고 영합하였으며, 백성들에게는 명령을 지나치게 엄하게 하고 형벌을 혹독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조고(趙高)의 요언에 현혹되어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웠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사는 나라에 충성을 다했으면서도 오형(五刑)을 받아 죽었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제대로만 일했던들 진실로 이사의 공적은 그로 하여금 주공(周公), 소공(召公)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을 것이다.

이사는 진승과 오광의 반란 시에 조고의 탄핵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이제 통일제국 진나라도 사실상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나고 다시 역사는 새로이 시작되고 있었다. 또 다른 장편 서사시 초한지가 이미 써지기 시작하였다. 중원에서 또 다른 피바람이 불어대기 시작하고 있었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장강은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중국 천하통일 끝>

<후기>

진실로 힘든 작업이었다. 참고문헌은 도처에 편편이 존재할 뿐 이를 거대한 물줄기로 만들어 장강의 물결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그 방대한 자료를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어떤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킬까 무수한 고민을 했다.

다행히 수많은 독자들이 열렬히 성원해주었다. 특히 판결문보다 더 자세히 천하통일을 정독한다는 법조인 친구, 지역구민들에게 일일이 퍼나른다는 여의도 아저씨, 한국과 중국의 일반 독자들에게 널리 읽혀 필히 한중문화교류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수 친구, 그리고 매회 끝날 때마다 다음 편을 빨리 쓰라고 재촉하며, 책으로 빨리 출판하라고 응원하는 수많은 독자들, 이들 모두 때문에 괴롭고 힘들었지만 계속 쓸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리고 지면을 할애해준 <아시아엔> 관계자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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