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 48] 진시황제 자신이 세운 통일 진나라 스스로 멸망시키다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는 통일 이후 15년, 진시황 사후 3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도대체 왜 그토록 강대한 힘으로 천하를 통일한 제국이 그 짧은 기간에 그토록 무기력하게 망했을까? 통일 진 제국을 세우는 데는 백성들과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 무수히 많은 제왕들과 천하의 현자들, 그리고 진나라 민초들과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는 모든 백성들의 피와 땀, 희생, 염원까지도 있었다.

다시 말해 진나라가 통일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진시황제의 업적은 사실 특별할 것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거의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대부분 제왕들이 항상 그러하듯이 이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만의 독재와 강압 정치를 계속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으로 이루어진 통일중국을 사후 3년만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책임은 거의 전적으로 진시황제가 져야 한다. 그는 통일 진나라의 과실을 백성들과 함께 나눠 가졌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영광을 독식했으며, 통일제국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잊었다. 왜 천하를 통일했는가를 백성들은 알지 못했다. 더 괴로울 뿐이었다. 법은 더 엄격해졌고 정부는 더 관용이 없어졌다. 황제는 괴물로 변해갔고 천하의 민심은 흉흉해져 갔다.

중국 역사상 이같은 사례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게 수나라다. 수양제는 쓸데없이 동방의 강국 고구려를 잘못 건드려서 망했고, 지금 진나라는 오직 진시황 개인의 잘못으로 망했다.

이제 진시황제의 공과 실패를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한다.

첫째, 진시황은 그가 멸망시킨 명문제국의 모든 것을 짓밟았다. 사실 과거의 전승국은 망한 나라의 문화적 전통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이어가게 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해서, 주나라도 은나라 유민을 송나라에 모여 살게 하여 전통을 잇게 했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이를 짓밟았다. 이런 무자비가 결국 민심을 동요시키고 진시황 사후 이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게 된 요인이다.

둘째, 진시황제는 백성들 앞에서 기고만장했고, 과대망상으로 신하들을 대하고, 제후 출신의 귀족들에게 안하무인의 극치를 보였다. 그는 진의 천하통일 위업이 모두 자신의 공으로 여겼다. 그는 어느 왕보다도 자신이 뛰어나기 때문에 전무후무한 명칭인 황제로 칭했고, 자신 이후의 왕들도 2세, 3세, 만세(萬歲)에 이르기까지 제위를 무궁하게 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마치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왕 구천이 갖은 고생 끝에 오나라를 물리치자,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고 같이 고생했던 충신들을 가벼이 대하자, 충신들이 “구천은 어려울 때 괴로움을 함께 할 수는 있어도 성공을 함께 누릴 수는 없는 자”라고 평하며 대부분이 그 곁을 떠나간 것과 같은 역사적 사례다.

만리장성 <사진=위키피디아>

셋째, 흔히 생각하듯이 만리장성은 진시황제가 처음 지은 것이 아니다. 만리장성은 사실 기존에 전국시대의 여러 나라의 장성을 진시황 대에 이르러 모두 연결하고 새롭게 보수한 것이다. 이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만리장성이 만들어진 이후에 장성의 남쪽은 모두 중국이라는 관념이 생겼다. 만리장성이 갖는 의미는 중국을 북방오랑캐로부터 지킨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오히려 만리장성을 쌓아서 스스로를 외부와 고립시켜 버린 소통부재의 의미가 더 크지 않을까?

그리고 당시 만리장성의 건설로 희생된 백성들의 피가 결국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만리장성 건설에 150만, 아방궁과 여산의 진시황 묘를 건설하는데 70만, 기타 광대한 도로·교량·수로 건설에 투입된 인원 등 모두 합쳐 헤아릴 수 없는 백성이 동원되었다. 이는 당시 전체 인구 약 2천만의 10퍼센트를 상회하는 숫자다. 당시 농민사회에서 장정들을 이처럼 동원하면 소는 누가 키우나?

넷째, 진시황제 당시를 규정하는 말이 여럿 있지만, 특히 저의반도(楮衣半道)와 도로이목(道路以目)이란 말이 유행했다. 저의란 죄수가 입는 붉은 옷을 말하는데, 곧 길거리에 반이 죄수라는 말이다. 도로이목이란 백성들이 길에서 서로 만나도 눈치 보느라 할 말도 못하고 눈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는 말이다.

이는 진시황제가 천하통일을 이룬 후에도, 오히려 더 나라를 경직되게 운영하였음을 말해주는 사례다. 법가의 대가 승상 이사의 통치이념이 법가적 엄벌주의와 준엄한 정의구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들 두 사람은 죽이 맞아서 백성들을 괴롭혔다.

결과적으로 진 정부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백성들과 격리된 고립무원의 정부가 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천하통일은 누구를 위해서 왜 했는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버림을 받게 돼서는 그 고통스런 통일과업을 안 하니 만도 못했다. 전국 7웅의 각국은 저마다의 문화와 역사의 전통 위에서 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승, 오광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엄격한 진나라 법 때문이었다. 진나라 관리로 인부들을 호송하던 임무를 맡았던 이들은 큰비로 정해진 기일에 도착할 수 없게 됐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조건 사형이었다. 이판사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한고조 유방도 한적한 시골에서 망나니로 읍장 정도의 낮은 벼슬을 하다가, 죄인호송 임무를 게을리 하여 임무를 달성할 수 없게 되자 동네 술친구들과 할 수 없이 들고 일어난 케이스였다.

다섯째, 진나라는 로마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도로를 건설했다. 이는 지리적 통일이란 이름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규모가 워낙 커 치적으로 불릴 수도 있겠으나, 백성들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러려고 통일했나?”라고 저마다 불만이었다. 도로의 종류 또한 많다. 도로건설은 점차 경제적으로 큰 의미가 있게 되었지만, 백성들 노역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도로의 종류도 다양해서, 그 명칭과 용도가 복잡하다. 우선 치도라 해서 황제 전용도로를 건설했고, 다음 직도로 수도 함양에서 구원으로 연결되는 직통도로로 길이가 1800리에 달하는 군사용 도로다. 오척도는 파, 촉 지역에서 운귀 고원으로 통하는 도로인데, 도로 폭이 5척이어서 오척도라 하였다. 신도는 남부지방에 건설한 도로로 대부분 지금의 강서성, 광동성, 호남성 지역에 걸쳐있다. 원래는 군사용 도로였지만 점차 진의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영거는 군량미 수송을 위해 판 수로로 총 길이가 34km로 남북 두개의 수로가 있다. 이 두개의 수로가 장강과 주강을 연결해서 중원과 영남지역을 관통한다. 이 또한 백성들의 노고가 컸으며, 또한 진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전국시대 내내 진나라가 몇 십만명의 대군을 일으켜 매년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저력은 정국거를 이용하여 생산된 농업 생산물에 의한 든든한 식량의 생산에 있었다. 그 밖에 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통일제국을 창건한 지 2년 후인 기원전 219년 호남성에 순수(巡狩)를 나갔을 때, 호남성을 남서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흘러 동정호로 들어가는 상강의 상류지역에 이르렀다가 주강의 지류인 계강(桂江)과 연결했던

영거(靈渠)라는 운하가 있다. 영거는 착공 5년만인 기원전 214년 완성되었는데, 길이는 33km에 달했다. 이 운하는 결국은 장강과 주강(珠江)을 연결한 것이 되었다. 진시황은 이 운하를 건설하여 50만의 대 병력과 군수물자를 강남으로 운송하여 당시 백월이라고 부르던 지역을 점령하고 중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특기할 것은 상강과 계강의 수위가 서로 달라 선박의 왕래가 불가능한 것을 갑문식 운하를 만들어 배가 다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갑문식 운하로 유명한 것이 파나마 운하다. 파나마 운하의 전장은 85km지만, 이는 주로 평지를

굴착하여 만든 것이고,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진 운하 영거는 중국의 상수와 계강의 상류지역인 해발 1000m 이상의 산악지역에 건설된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어찌 됐든 대단한 중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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