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 47] ‘어머니 콤플렉스’ 극복 못한 진시황 마침내 눈 감다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진시황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아무도 막을 자가 없었다. 그의 본성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어머니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누구도 믿지 못하는 괴퍅한 성격이 나온다. 맏아들 황태자 부소가 분서갱유를 자행하는 아버지 시황제에게 간언했으나, 부소는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대장군 몽염이 있는 국경으로 쫓겨났다.

이에 대해 진시황의 아들을 위해 제왕학을 가르치는 심모원려라는 견해도 있지만 이것이 불행의 씨앗이 된다. 만약 인격과 능력을 갖춘 황태자 부소가 진시황의 뒤를 이어 2세가 되었다면 통일 진나라는 달라졌을까?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 침입을 염려하여 서쪽 임도로부터 동쪽 요동까지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명에 이르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70만명의 인부를 동원해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다. 이런 대토목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동시에 진나라에 전통적으로 확립된 법가사상에 기초하여 엄중한 법체계를 시행하였다.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친족을 몰살시켰고, 나아가 한 집이 법을 어기면 마을 모든 가구도 똑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였다. 관청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죄인들의 행렬이 즐비했다.

시황제는 자신이 불로장생하길 간절히 빌었다. 이에 전국 명산에 방사(放射)들을 보내 불로장생의 약을 얻으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서복이라는 사람이 시황제에게 왜국에 그 약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여, 서복은 소년소녀 3000명을 데리고 왜국으로 건너가 다시는 진나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왜국이 서귀포라기도 하고, 일본이라기도 하였다.

시황제는 재위 기간 중 무려 다섯 차례 전국 곳곳을 순행하였다. 사실상 재직 기간 내내 천하를 돌아다닌 것이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극도의 불안심리와 자기방어 심리의 발로라 여겨진다.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였다. 잠자리도 흔들거리는 수레 안이 아니면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용한 대궐 안은 언제나 불안했다. 수만 명의 병사들이 바로 문 앞에서 지키는 수레가 오히려 편안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항상 승상 이사와 내시 조고가 입의 혀처럼 자신을 수행했다. 그 역시 외롭고 두려웠다. 또한 시황제는 순행 시, 언제나 5개의 수레를 군사들이 호위토록 하고, 자신은 그 수레 중 하나에 탔다. 시황제는 자신을 죽이려 드는 자객을 두려워했고, 언제나 대비했다.

그리고 시황제의 집권 후반부에는 동남쪽 방향에 이상한 서기가 넘쳐나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천하통일의 패자가 출현할 것이라는 점궤가 나와 이를 억르기 위한 방책이 난무했다. 이를 위해서 자신이 이룩한 통일천하의 방방곡곡에 자신의 송덕비를 세워 자신의 공적을 과시했다. 그러나 점궤가 말하는 그곳은 바로 강소성 패현으로 두번째 천하통일의 주역 한고조 유방이 일어난 곳이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찌 인간이 막을 수 있을까? 그것은 영정 자신이 시황제가 된 것과 같은 이치다.

시황제는 거의 온 중국 대륙을 돌아다녀 자신이 성공한 군주임을 천하에 과시했다.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 마지막 순행을 하였다. 여기에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 그리고 자신의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호해가 뒤따랐다. 시황제가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에서 유성이 떨어졌는데 그 운석에 누군가가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즉,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고 써놓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황제는 그대로 병으로 쓰러졌다. 그가 얼마나 속으로 심약하고 콤플렉스에 젖어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시황제는 사구 지방에 이르자, 병이 매우 위독해졌으며 유언장을 조고에게 쓰라 했다. 그 안에는 옥새를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케 하고, 부소에게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 진시황제 영정은 50세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인 여산에 묻혔다. 이 능묘는 1974년 우물공사를 하면서 부장품인 병용(군사모양의 인형)과 더불어 발견되어 지금까지도 발굴 중이다.

진시황릉 <사진=위키피디아>

진시황 사망 당시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 죽음을 숨겼으며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해 황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이에 장자 부소는 즉시 자결하였으나, 몽염은 이 명에 대해 의심을 품어 자결하지 않았다. 하지만 군사들에게 체포당해 압송된 후 처형당했다. 얼마 뒤, 시황제의 26번째 아들 호해가 황제에 오르니 그가 진 제국 2세 황제다.

시황제의 사후, 환관 조고(趙高)가 어리석은 2세 황제를 허수아비 황제로서 권력을 제멋대로 농락하면서 폭정을 일삼았다. 시황제의 사후 진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다음 해에는 진승, 오광의 반란이 발발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거대한 분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나라 2세황제와 조고는 장한(章邯) 장군을 반란군에 대한 토벌군으로 보낸다. 장한은 진승군을 격파하고, 다음에는 초나라의 항량군도 격파했다. 그러나 항량의 조카 항우와의

결전에서 패배하여 장한은 포로가 된다. 항우는 함양으로 향하는 도중 반역의 기색을 보인 진나라 병사 20만을 죽여 버렸다.

장한이 대패한 것을 들은 조고는 낭패해졌고, 2세 황제를 폭정의 오명을 씌운 다음 살해하고, 자영을 세워 민의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지만, 반대로 자영에 의해서 주살당했다.

그 후, 유방이 함양에 들어가자, 자영은 즉시 항복하고 진은 멸망했다. 유방은 자영을 죽이지 않고 방치하였으나, 나중에 함양에 도착한 항우는 철천지 원수 진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즉각 자영을 죽이고, 부하들을 풀어 함양의 궁녀들과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불질러 함양은 아비규환의 폐허가 되었다. 천하의 진시황의 천하통일도 그저 잠시였다. 하늘을 탓할까, 인간을 탓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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