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천하통일 42] 진 영정왕은 전국시대 통일 어떻게 이뤘나?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춘추전국시대 그 많은 나라 중에서 어느 나라인들 아깝지 않으랴마는 전국 7웅 가운데 6국의 멸망은 너무도 참혹하고 안타깝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찬란하기 그지없는 기라성 같은 나라들이 지도자의 한순간의 잘못으로, 또는 인사 한번 잘못하여 나라 전체가 풍지박살 난 것을 보면 실로 모골이 송연하다.
대신들이 수립하고 집행하는 정책결정도 전장의 장수가 진군하여 싸우는 전투도 모두 나라의 명운과 직결된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원균의 전투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칠천량전투에서 원균의 단 한번의 실수가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그 패전으로 조선의 바닷길을 순식간에 내주고 왜적은 그길로 경상 전라 충청 삼도를 초토화시켰다. 그 직후 이순신이 복귀하여 울돌목 명량과 이슬다리 노량에서의 대승으로 왜적을 물리쳤다.
임진왜란 7년 내내 적장 풍신수길은 오매불망 이순신을 죽이는 것이 지상최대 목표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하였고 적장 풍신수길도 패전의 후유증으로 죽고 급기야 침략군은 모두 저들의 고향 왜국으로 도망가지 않았던가!
그 한참 뒤 러일전쟁 당시 왜국의 총사령관 노기는 출전 직전에 조선 아니 세계의 군신(軍神) 이순신에게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
기원전 260년 장평(長平) 천하대전에서 40만 대군을 잃고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 강대국 조나라는 영정 19년(기원전 228) 진나라 명장 왕전(王?)에 의해 수도 한단(邯鄲)이 함락되고 멸망했다. 그 과정은 아무리 곱씹어 봐도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전개였다. 사이비 영웅 조괄을 대장군으로 삼아 40만 대군을 몰살시킨 어리석은 조의 효성왕이 죽고 그의 아들 도양왕이 뒤를 이었으나, 도양왕 또한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훌륭한 아들 태자 조가(趙嘉)가 아비인 자신을 비판하자 태자를 폐하고, 우매하고 아무 생각 없는 동생 조천(趙遷)을 태자로 세웠다. 도양왕이 재위 9년만에 죽자 조천이 뒤를 이었는데, 이 사람이 진나라의 반간계(反間計)에 당해 조나라를 말아먹은 유목왕이다.
기원전 229년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유목왕은 당대의 명장 이목(李牧)과 사마상(司馬尙)을 보내 진군과 맞서게 했다. 이목은 일찍이 비(肥)지역에서 진나라 대군을 대파한 공으로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진 명장이다. 천자문에 나오는 ‘기전파목 용군최정’(起?頗牧 用軍最精) 대목의 진나라 백기(白起)와 왕전(王?), 조나라 염파(廉頗)와 더불어 전국시대 4대 명장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이목 장군은 수성과 기다림의 전략으로 상대를 지치게 만들고 난 뒤에 적군이 안심할 때 공격하는 전략으로 조나라를 지켜왔다.
이번에도 진나라는 명장 왕전과 양단화를 앞세워 조나라를 공격하는데, 이목과 사마상은 이번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수성에만 몰두하여 진을 지치게 하였다. 이목의 조나라는 난공불락이었다. 진나라의 이사는 선배 재상들이 써먹던 고전적인 수법을 다시 쓰기로 했다. 이는 이목을 제거하기 위해 유목왕이 총애하는 천하의 간신이자 매국노의 상징 곽개(郭開)를 또 다시 매수하는 작전이다. 곽개는 이 전쟁에서 자신이 득 될 것이 없다 생각하고 있던 차에 진의 반간계를 접하고는 망설임 없이 이목과 사마상이 모반을 꾀한다고 모함한다. 우매한 유목왕은 조총(趙?)과 안취(顔聚)를 보내 이목과 사마상을 대신하게 하고, 거기에 이목까지 죽여 버렸다. 도대체 이런 한심한 지도자가 계속하여 버티고 있는 조나라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진의 장군 왕전은 즉시 조나라 군대를 쳐 조총을 죽이고 파죽지세로 수도 한단까지 밀고 들어가 유목왕을 포로로 잡아 하남 방릉(房陵)으로 유배시켰다. 결국 곽개도 조나라의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숨겨뒀던 재산 다 털리고 비참하게 암살당하게 된다. 조가 망한 것은 너무도 당연지사!
이로써 조나라는 할아버지 효성왕과 손자 유목왕이 진나라의 계략에 말려들어 3대에 걸쳐 미친 짓을 하다가 완전히 나라를 말아먹고 말았다(기원전 228년). 이에 조나라의 대신들은 전 태자 조가를 왕으로 옹립하고 대성 지방에서 항거했으나, 기원전 222년 진나라 군대에 의해 대성이 무너지고 대왕 조가는 항복했다.
대마불사의 신화, 강대국 조나라가 이렇게 멸망할 줄 아무도 몰랐다. 사가들은 조나라의 멸망시기를 실제로 유목왕이 잡혀 망한 기원전 228년으로 본다.
진왕 22년(기원전 225년), 영정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무엇이 두려우랴! 군사를 둘로 나눠 한쪽으로는 초나라를 치고, 또 한쪽은 왕분(王賁)으로 하여 위나라 수도 대량(大梁)을 치도록 했다. 물론 1차목표는 위나라. 초로 하여금 함부로 협공치 못하게 하려는 뜻이다. 위나라 군대는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다. 진나라 군대는 공격할 방도가 없어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는데, 원병 요청을 받은 위와 합종의 나라 제와 초나라는 자기 코가 석자인지라 도울 수 없었고, 위나라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왕분은 연일 큰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황하와 변하(卞河)의 홍구(鴻溝) 두 강을 이용해 성을 공격하기로 결정, 물길을 터서 두 강의 강물을 끌어와 대량으로 흐르도록 했다.
대량은 성벽이 물에 젖어 허물어지고 말았고, 홍구는 위혜왕(재위 BC370∼319)이 도읍을 대량으로 옮긴 후 수리 공정을 위해 팠던 운하였는데, 결국은 위나라를 멸망시키는 결정적인 무기로 변해 버렸다.
위혜왕이 바로 <맹자>에 나오는 유명한 양혜왕(梁惠王)이다. 위혜왕은 수도를 안읍(安邑)에서 대량으로 옮겼기 때문에 양혜왕으로도 불린다. 명군 양혜왕이 맹자의 유가적 덕치주의로 든든하게 만들었던 위나라도 후대 왕의 무능으로 진왕 22년(기원전 225년) 이렇게 무너졌다.
인재의 보고 위(魏)나라가 대체 어떻게 이리도 허망하게 멸망할 수 있었을까? 전국 7웅 중에서 가장 먼저 왕을 칭하고, 역대에 걸쳐 경세가·군사전략가·정치가 등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했던 위나라가 천하통일은커녕 이렇게 멸망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사의 실패, 소통의 실패에서 기인했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인재를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하거나 국외로 유출시켰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스타 중의 스타인 오기·상앙·손빈·범수·신릉군 등이 대표적이다.
또 하나, 위나라의 사례를 봐도 우리는 절감한다. 맹자의 덕치주의와 순자의 법치주의가 피 튀기는 정치현실에서 부딪쳤을 때의 결과가 너무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중원의 한 복판에 자리한 천하의 위나라는 지세가 좋아 예로부터 줄곧 뛰어난 인물을 배출해 군주나 재상들이 조금만 마음이 열리고 세상과 소통하기만 했어도 천하통일을 이룰 기회가 있었다. 그릇이 안 되는 한심한 지도자라는 것들이 인재를 알아볼 줄 모르고 오히려 배척하거나 다른 나라로 유출시켰다.
그 결과 부국강병의 기회를 스스로 놓쳤고,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유속불식무익어기 도현불용무익어삭!’(有粟不食無益於饑, 睹賢不用無益於削)
“곡식이 있어도 먹지 않으면 굶주림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어진 사람을 보고도 쓰지 않으면 망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