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 46] 영정왕 드디어 진시황으로 등극하다
[아시아엔=강철근?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영정은 기원전 247년 아버지 장양왕이 재위 3년만에 죽자 왕위를 계승하고, 기원전 238년 영정왕 9년 22세 나이로 고도 옹성(雍城)에서 대관식을 거행, 친정을 시작했다. 기원전 221년 진왕 26년 중국최초로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다시 말해 영정왕은 22세에 친정을 시작, 29세에 출병하여 불과 17년만에 춘추전국시대 5백년간 지속되어오던 제후국들 사이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중국최초의 천하통일이라는 역사적인 대업을 완성하였다.
영정왕은 대신들에게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제도와 법을 창시하도록 명하였다. 승상인 왕관을 비롯하여 비서실장격인 어사대부정위 이사(李斯) 등이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영정왕에게 천하통일의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칭호를 가지라고 건의한다.
“그 옛날 오제(五帝) 시절에는 땅이 사방 천리에 지나지 않았고, 밖으로는 여러 이민족들이 할거하여 천자가 천하를 온전히 제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폐하께서 천하를 평정하고 전국에 군현을 두어 하나의 법령으로 다스리게 되었으니, 상고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고대에는 천황·지황·태황 등 3황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태황이 가장 존귀했다’ 하므로, 신들은 황공하옵게도 존호를 ‘태황’(太皇)이라 정하여 올리고자 하옵니다.”
이에 진왕이 한마디로 정리한다. “태황의 황(皇)자만 취하고 오제의 제(帝)를 취하여 ‘황제’(皇帝)라 하고, 나머지는 그대들의 의견대로 하라.“
영정은 천하통일을 최초로 달성한 자신에게 스스로 취하여 존귀케 하였다. 그는 이미 스스로 신의 경지로 올라서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삼황오제에 대해 간단히 알아본다. 물론 이는 중국 태고의 신화지만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 등 간단치 않은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사마천은 3황을 천황 지황 태황이라 했지만, 이 부분만큼은 송나라 때까지의 사서 18서를 총정리한 <십팔사략>에 나오는 삼황오제에 대한 학설을 따른다.
삼황은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을 말한다. 그들은 각각 인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반인반수의 신화적 존재들이다. 삼황의 첫째인 복희는 뱀 몸에 사람 머리를 하고 있으며, 인류에게 처음으로 사냥법과 불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두번째 삼황인 신농은 염제(炎帝, 불꽃 임금)라고도 불리는데 사람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으며, 태양신이자 농업신으로 인류에게 농경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그의 성씨는 강(姜)이었다.
세번째 황제 헌원(軒轅)은 사람들에게 집짓는 법과 옷 짜는 법을 가르쳤으며, 수레를 발명했다. 글짜를 처음으로 도입해 천문과 역산을 시작하고, 의료술을 시작하였다. 황제는 특히 그 위세가 대단하였는데, 이러한 황제의 위세에 모든 신들이 고개 숙였으나 오직 치우 신만이 저항하며 당당히 황제와 싸움을 벌였다. 치우는 부하인 풍백, 우사와 함께 저항했으나 결국 황제에게 패했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의 관변학계는 느닷없이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황제 신화를 漢族의 국민 설화로 만들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 동북공정의 명분도 여기서 나온다.
중국의 소수민족 묘족(苗族) 등은 치우를 민족의 조상으로 추앙하며, 한국의 일부 野史에서는 치우씨(蚩尤氏) 혹은 치우천왕(蚩尤天王) 등으로 부르며 치우 또는 그 부족이 한족과 크게 싸웠다고 주장한다.
오제에 대해서도 역시 <십팔사략>의 견해를 따르는데, 오제는 황제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을 뜻한다. 소호 금천, 전욱 고양, 제곡 고신, 제요 도당, 제순 유우의 다섯이다. 마지막 두 왕을 따로 떼어 우리가 잘 아는 요순 임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황제’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영정은 첫 황제라는 의미에서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 되었고, 이후에는 왕의 시호를 따로 정하지 않고 ‘2세, 3세…’ 등으로 숫자만 이어 ‘만세일계’로 나가기로 정했다. 그러나 실제로 진시황은 이날로부터 불과 11년만에 죽었다. 통일제국 진의 황실은 ‘3세 황제’가 즉위한 27년째에 항우와 유방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진나라는 변방의 오랑캐국가로 출발하여 기원전 777년 주(周)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받았다. 그로부터 555년만인 기원전 221년 천하통일의 주인공이 되었으나, 그로부터 15년년만인 기원전 206년 통일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진시황은 시황제이면서 동시에 실제로 진나라의 최후의 황제가 되었다. 물론 2세 황제 호해와 자영이 있지만….
그의 시대에 봉건제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최초로 정착되었으며, 지방은 전국 36개 군현으로 나눠졌다. 국가와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은 검정색으로 정했는데, 이는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오행(五行) 가운데 수(水)가 곧 진나라의 숫자로 보았고, 수는 물을 상징하며, 색으로는 검정색, 숫자로는 6에 해당한다. 그래서 검정색 깃발을 쓰고, 검정색 옷을 입었으며, 부절과 관을 여섯 치로 규정하고, 여섯 자를 1보(步)로 하는 측정 규격도 만들었다. 중원을 가로지르는 황하(黃河)는 진나라의 덕을 상징하는 큰 물(德水)로 삼았다.
중국인들은 진 시황제를 중원을 통일한 황제로 중국의 영토와 역사적 근간을 이룬 인물로 16년이란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불가사의한 치적과 함께 학정·폭정 등 공과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대한 군주로 생각하고 있다.
진시황제(秦始皇帝, 기원전 259년 1월~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는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다. 대규모 분서갱유 사건을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 국가들이 각자 쌓았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왕조들의 기본틀을 세웠다.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는 유생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를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진시황제 영정은 이사를 승상으로 승진시켜 그와 함께 통일 중국을 다스렸다. 기원전 213년, 순우월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이 때, 순우월이 봉건제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승상 이사는 이를 새 황실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을 제외한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 주청했고,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다. 이것이 분서(焚書)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불로장생이 웬말이냐며 시황제를 순리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고 비판하며 도망쳐 버렸다. 열 받아 있는 시황제에게 조정 안에 수상한 학자들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일삼는 학자들을 모두 청소하리라 작정한 진시황. 시황제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이니, 그 수가 460여명 되었다. 이사는 그들을 한꺼번에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다. 사가들이 이 두 사건을 합쳐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