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 44] 영정왕, 사마천 ‘자객열전’ 으뜸 연나라 ‘형가’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사마천의 <자객열전> 중에서도 제일은 누가 뭐래도 형가(荊軻)에 관한 이야기다. 그 역시 인재의 보고 위나라 출신인 형가는 연(燕)에 들어가 ‘개백정’ 노릇을 하면서 예술가 고점리(高漸離)와 친구였다. 고점리는 축(筑, 현악기의 일종)의 예인이다.
형가는 연의 장바닥에서 술을 마시다 취하면 고점리가 켜는 축의 반주에 맞추어 저자 한복판에서 노래를 불렀고, 시대를 한탄하며 크게 통곡하는데, 행동은 마치 자신의 옆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하여, 훗날 이것이 ‘방약무인(傍若無人)’의 고사성어가 되었다.
개백정으로 살면서도 형가는 여전히 독서를 좋아했고 각지에서 찾아온 현인과 호걸, 덕망 있는 자들과 교분을 맺었으며 연의 귀족 전광의 빈객이 되었다.
기원전 233년, 연의 태자 단(丹)이 인질로 있던 진(秦)에서 도망쳐 왔다. 단은 자신을 멸시하고 천하를 위태롭게 하는 진의 영정을 죽이기로 결심하여, 자객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러한 단에게 전광은 형가를 추천했다. 자객 의뢰를 받은 형가는 기꺼이 죽기로 결심하고는 진왕에게 가까이 다가갈 방법을 찾았다.
그 방법이란 첫째로 연에서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인 독항 땅을 바치는 것, 다른 하나는 과거 진의 장군으로서 정의 노여움을 사서 일족이 처형되고 연으로 망명해 온 번어기의 목을 바치는 것이었다. 태자 단이 차마 자기 손님의 목을 내달라고 할 수 없다 하니, 형가는 직접 번어기를 찾아가 설득했고, 번어기는 천하의 안녕을 위해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결하여 자신의 목을 형가에게 내주었다. 한편 단은 암살에 쓰기 위한 예리한 비수를 백금을 주고 사서는, 이 비수에 독을 발라 사용키로 했다.
기원전 227년, 태자 단은 자객으로 가는 형가에게 진무양을 동행으로 추천했다. 진무양은 13세의 나이에 사람을 죽여서 장사로서 이름난 자였다. 그러나 형가는 진무양을 소인배로 못 미덥게 생각했으나 하는 수 없이 데리고 가기로 했다.
진으로 떠나던 날 태자 단을 비롯해 사정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소복(상복)을 입고 역수(易水, 황하 북쪽을 흐르는 강) 부근까지 전송하러 나왔다. 모두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형가의 친구 고점리는 축을 타고, 형가는 그의 심정을 노래하였다.
風蕭蕭兮易水寒(풍소소혜역수한)
壯士一去兮不復還(장사일거혜불복환)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 물은 차구나.
장사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
이 시구는 <사기>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당시 이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 처절한 축 연주와 형가의 노래하는 소리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고 하였다.
진의 수도 함양에 당도한 형가는 진무양과 함께 진의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가져온 선물에 진왕 정은 크게 기뻐하며 구빈(九賓)의 예로 형가 등을 맞아들이게 했다. 그런데 진무양이 진왕 정 앞에서 공포심에 그만 벌벌 떨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군신들이 미심쩍어 하며 어떻게 된 거냐며 묻자 형가는 웃으며 “북쪽의 촌놈이 천자를 뵈니 어쩔 줄을 몰라 저럽니다”라며 둘러댔다. 형가는 직접 진왕 정에게 지도를 해석해주겠다며 가까이 접근했고, 두루마리로 된 지도를 풀자 두루마리 끝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검이 나타났다. 형가는 비수를 잡고 진왕의 소매를 잡아 그를 찌르려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진왕의 옷소매만 끊어지고 진왕은 피할 수 있었다.
진왕은 다급히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려 했지만, 검이 너무 긴 탓에 칼집에 걸려 빠지지 않았다. 진의 법률상 궐내에 아무도 검을 가진 자가 없었으므로, 형가는 비수를 가지고 진왕을 뒤쫓았고 진왕은 필사적으로 기둥을 이리저리 돌며 도망쳤지만, 진왕의 검은 빼려고 서둘면 서둘수록 오히려 잘 빠지지 않았다.
군신들이 맨손으로라도 형가를 제압하려 하는 와중에, 시의(侍醫) 하무저가 갖고 있던 약상자를 형가에게 집어던졌다. 형가가 피하는 사이 좌우에서 “왕이시여, 검을 등에 지고 뽑으소서!”라고 외쳤고, 진왕은 얼른 검을 등 쪽으로 돌려 짊어진 상태로 간신히 검을 빼어 형가에게 휘둘렀다. 형가가 가진 짧은 비수는 장검에 맞설 수 없었고, 형가는 진왕의 검에 다리를 베여 더 걷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진왕을 향해 비수를 집어 던지지만, 비수는 진왕을 비껴가서 기둥에 박혔다. 형가는 웃으며 진왕을 욕했고, 곧 바로 격노한 진왕이 형가의 온몸을 산산이 토막내 버렸고, 형가가 죽은 뒤 그 시신까지 참수했다. 진무양은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면서도 끝까지 벌벌 떨며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생각도 못했던 끔찍한 사건에 진왕은 격노하여 이듬해 기원전 226년, 연을 쳐서 수도 계(?, 지금의 베이징)를 함락시켰다. 암살 음모의 주모자였던 태자 단은 연왕의 명에 따라 목을 바치게 되었지만, 진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기원전 222년 연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형가의 친구 고점리는 쫓겨났고, 성과 이름을 바꾼 뒤 송자에 숨었다. 한참 후 천하통일을 이룬 뒤, 진왕 정은 동쪽을 순행하여 산동지방에서 “송자 땅에 축을 잘 타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시황제 앞에 불려온 고점리 또한 친구 형가의 복수를 위해 시황제를 암살코자 하였다.
그러나 환관 조고(趙高)에 의해 고점리는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 시황제는 고점리의 축 타는 재주를 아껴 그를 죽이는 대신 그의 눈을 멀게 하고 궁중악사로 축을 연주하게 했다. 이에 고점리는 여전히 진왕을 암살하기 위해 축 속에 흉기를 집어넣고 기회를 엿보았다. 연주하는 날, 장님인 고점리는 소리로 영정왕의 위치를 확인하고 축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축은 목표에서 빗나가서 암살 기도는 실패했고, 고점리는 그 자리에서 붙잡혀 온몸이 걸레가 되었다.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영형가(詠荊軻)’라는 시를 지어 형가의 장한 죽음을 슬퍼했다!
提劍出燕京(제검출연경)
飮餞易水上(음전역수상)
四座列群英(사좌렬군영)
漸離擊悲筑(점리격비축)
宋意唱高聲(송의창고성)
心知去不歸(심지거불귀)
且有後世名(차유후세명)
奇功遂不成(기공수불성)
其人雖已歿(기인수이몰)
千載有餘情(천재유여정)
칼 들고 연나라 서울을 나서고
역수 가에서 전별주 마실 때,
자리에는 영웅들 앉아 있네.
점리는 비장하게 축을 연주하고
송의는 소리 높여 노래 부르네.
우리는 이미 안다, 그대 가서 돌아오지 못함을.
그렇지만 후세에 이름은 남으리!
뛰어난 공적은 마침내 이루지 못하고
지금 그 사람 육신은 없어졌지만,
비통한 심정은 천 년을 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