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 49] 시안 ‘병마용’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항상 그러하듯 역사상 커다란 유물·유적은 기획된 발굴보다는 너무도 우연히 마주친다. 운명적 만남이랄 수밖에 없다. 1974년 중국 여산 지방 옥수수밭에서 우물파기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마을사람들이 부드러운 밭을 한참을 파내려가던 중 갑자기 단단한 지층이 나왔다. 이것이 대체 뭔가?

조용하던 시골 땅이 갑자기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순간이다. 2천년 넘게 숨겨져 왔던 진시황의 부장능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파도 파도 끊임 없이 엄청난 병마용이 나오기 시작한다. 흙으로 빚은 각양각색의 표정을 가진 시황제의 근위병과 호위병들! 병마용의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그리고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되었다. 연구 결과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종류의 틀이 사용되었다. 다른 부위도 각기 여러 종류가 있어 이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형태의 병마용을 제작한 것이다.

병마용 <사진=위키피디아>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중국 산시성 시안시 린퉁구에 있는 진시황릉에서 1.5km 가량 떨어져 있는 유적지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사, 말 등의 모형이 있는 갱도다. 능묘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살아 있는 궁전이었다. 궁전, 누각, 회랑 등이 갖추어 있고, 돔식 천장에는 보석과 진주를 박아 일월성진이 반짝이고 있으며 고래 기름으로 만든 조명이 있다. 그냥 살아있는 왕과 근위병들이 거처하는 궁전이었다.

또한 도굴꾼이 함부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화살장치와 각종 함정장치 등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부장능에 대한 것은 아무도 몰랐다. 철저한 비밀이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렇다. 이 능 건설에 동원된 인부들은 능묘 완성과 더불어 순식간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 능묘에 관련된 병사들은 2세 황제 호해가 베푼 하사주를 마시고 그대로 직사하거나, 한꺼번에 능속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진나라는 坑儒와 坑兵의 달인들이었다. 여산릉 건설에 동원된 백성은 연인원 7만여명, 그들이 모두 사라졌다.

진시황릉에서 남동쪽으로 1.5km 떨어진 지점 지하 4~5m에서 발굴된 병마용갱은 진시황릉 동쪽 끝을 보위하는 동부순위대로 추정됐다. 발견 당시부터 병마용은 전차전의 전투대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실물 크기의 진흙으로 만든 상과 말은 아주 섬세하게 만들어졌다. 모두 6천여개 되었다.

1호갱은 거대한 돔으로 덮인 것으로 신장 178~187cm 크기의 병사가 3열 종대로 늘어선 병마용과 40여승의 목조 전차가 안치되어 있다. 1호갱보다 규모가 작은 2호갱의 병마용은 주력부대를 보조하는 부대일 것이다. 제일 작은 3호갱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토로 양측에 정렬해 있어 경호부대로 보이는데 그곳에서는 사슴뿔, 짐승뼈 등이 출토되었다.

중국정부는 1987년 진시황릉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방면의 최고전문가인 당시 시안대학 고고학과 주임교수였던 천징웬은 학술잡지 <대자연 탐구> 1984년 겨울호에서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중국 역사학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의 주장부터 들어보기로 한다.

첫째, 병마용의 군진은 진시황 당시의 군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1호, 2호갱에서 병사들은 전차를 중심으로 사열하고 있는 모습인데 <사기>를 위시한 모든 사적은 “진시황의 군사는 기동력이 강한 기병을 활용하여 천하를 통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진시황 당시 전차전을 벌였다는 역사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병마용의 군진은 진시황 시대 이전의 전국시대 초창기인 구시대의 것이라고 할 것이다.

둘째, 병마용의 병사들은 각양각색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일부는 모자까지 쓰고 있으나 전쟁 필수품인 투구를 쓴 병마용은 볼 수 없다. 병사들의 차림새가 너무 허술하다. 즉 병마용은 진시황을 위한 것이 아니다.

셋째, 병마용의 모든 칼라는 진시황 정부의 그것이 아니다. 진시황은 검은색을 통일제국의 색깔로 정하고 의복, 깃발, 휘장에 전부 검은색을 사용할 것을 규정했다. 그러나 병마용의 병사들은 진한 빨간색, 진한 녹색의 도포와 파란색, 보라색, 흰색 등의 화려한 긴바지를 입고 있는 게 이상하다.

넷째, 병마용에서 출토된 도끼와 모자 및 여성처럼 쪽진 머리 모양, 병마용에 새겨진 문자 등은 진나라보다는 오히려 초나라의 풍속과 많은 유사점이 보인다.

천징웬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병마용의 주인은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진나라 28대 소양왕의 모친, 즉 진시황의 고조할머니인 진선태후이며, 병마용은 진선태후의 유해를 그녀의 고향 초나라로 운구하는 행렬이다.

또한 저명한 진·한시대에 정통한 사학자 임검명은 1985년에 발간된 학술지 <문박 제1기>에서 ‘진용지미’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아래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천 교수의 주장에 부분적 지지를 보냈다.

“병마용이 진시황릉의 일부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결정적 문헌자료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병마용에서 출토된 병기의 대부분은 청동기인데, 이것은 철제무기를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하던 진시황 당시의 전비상황이나 야금기술 수준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 후 수많은 학자들이 발표한 병마용 관련 연구 내용을 종합해보면 첫째,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에서도 병마용갱에 관해서는 단 한 구절의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사기 외에 <회남자> <문헌통보> 등 중국의 웬만한 고서에도 진시황 병마용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둘째, 진시황릉은 규모면에서 어느 것과도 비교를 불허한다. 세계최대였던 쿠푸왕 피라미드보다 10배 이상 크고 넓다. 병마용 6천개 정도가 아니라 그 몇 백배를 묻어 두어도 남을 만큼 광활한 진시황릉을 그대로 놔두고 1.5km 떨어진 다른 곳에 따로 묻어둘 필요가 있을까? 또한 진시황릉에서 병마용 부근까지 1.5km 외곽으로 더 나아가 거기서 원을 그려 산출되는 총면적은 19.925km로 웬만한 소도시 규모로 어마어마하다. 황릉이 이렇게 넓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셋째, 순장이나 부장품은 능원 안에 있지, 능원 밖에서 발견된 예는 중국에 없다. 어떠한 순장이나 부장품도 능원에서 5리나 떨어진 지하에 묻어둔 적이 없다. 1999년 9월28일 일반인에 개방된 시안의 한양릉의 도용과 장쑤성 쉬저우 한양묘의 병마용도 전부 능원 안에 있다.

넷째, 병마용의 주인이 정말 진시황이라면 동서남북 4방을 다함께 중시해 온 중국이 동쪽에만 병마용을 묻어 두었을 리 없다.

다섯째, 병마용의 정확한 위치는 진시황릉의 정동쪽이 아니라 남동쪽에 있다는 점이다. 진선태후의 고향 초나라는 진나라의 남동쪽에 있다.

여섯째, 진나라에는 순장의 폐습이 존재했다가, 목공 이후 서서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남쪽의 초, 월, 오 등에서는 순장 대신 도용, 목각, 옥기 등 각종 부장품을 매장했다. 진선태후가 초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과도 맞아 떨어진다.

그러고 보면 1990년대 이후에 나오는 중국사 연구서에는 ‘진시황병마용’이라는 말 대신 그냥 진용(秦俑)이라 표현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병마용은 계속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