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 29] 왕에 애첩 바친 여불위, 진나라 섭정으로 무소불위 권력 휘둘러

여불위 <사진=네이버 지식백과>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태자비의 언니는 그동안 많은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녀의 동생인 태후는 여불위를 만나자마자 호감을 보이며, 지난번 주황실의 보석이 너무 좋았다고 칭찬부터 하였다.

언니가 배달사고 안 내고 심부름을 잘한 것이다. 여불위는 얼른 지난번보다 훨씬 좋은 보석을 바친다. 놀라며 기뻐하는 태후.

여불위는 화양부인께 고한다.

“지금 조나라에 인질로 나가있는 왕자 이인은 참으로 효심 있고 성실한 청년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태후마마를 친어머니처럼 그리워하며 매일매일 눈물로 지내고 있습니다. 부디 태후마마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양자로 삼으시면, 안국군과 화양부인 두 분께 커다란 기쁨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인을 안국군의 세자로 삼으시면, 형제간의 싸움도 멈추게 될 것이고, 특히 마마의 노후를 보장할 수가 있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후사가 없는 화양부인의 걱정거리를 미리 챙기며 설득하는 여불위의 간청은 바로 먹혔다. 여불위의 듬직한 금력과 후사에 대한 대비책은 태후의 마음을 얻는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태후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곧 안국군에게 말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다시 조나라로 돌아온 여불위는 영이인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자신과의 약조를 확실히 해줄 것을 새삼스레 약속토록 했다. 당연히 영이인은 여불위를 자신의 후견인으로 선언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배신하지 않을 것을 재삼 약속했다. 여불위는 이인에게 양어머니 화양부인의 출신을 따라서 이름을 자초(子楚)로 바꾸게 하였다. 그가 영자초다. 이제부터는 그를 영자초라 부르기로 한다. 그는 훗날 안국군 효문왕을 이은 30대 장양왕이 된다.

여불위는 여기서 한술 더 뜬다. 그의 철학은 남에게 줄 때는 언제나 최고의 것을,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준다는 점이다. 그는 주는 김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애첩 천하일색 조희까지 영자초에게 준다. 자초가 평소 조희를 은근히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여불위가 엄청나게 큰 선물을 준 것이다. 웬만해선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하고 남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여불위에게는 아니, 보통의 남자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얼마 후에 자초 부부는 아들을 낳게 된다. 결혼한 사람들이 아들 낳는 게 무슨 대수인가 하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바로 이때 우리의 존경하는 천하의 사가 사마천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사기>에서 “여불위가 자신의 애첩이었던 조희를 마음에 들어 하던 자초에게 바쳤는데 조희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그 아이가 바로 훗날 진의 31대 왕으로 즉위하게 될 정(政, 훗날의 진시황제)이다”라고 하였다.

이 얘기는 사실 여부(與否)를 둘러싸고 논란에 휩싸였고,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달랐다. 여불위가 시황제의 친아버지인가에 대한 소문은 이미 시황제 생전부터 떠돌고 있었고, 진시황제도 이런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여불위가 시황제의 친아버지임을 부정하는 진나라 측의 사가들은 시황제를 중상모략하려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하였다.

기원전 252년, 진의 소양왕이 재위 55년만에 죽고 차남이며 세자인 안국군이 효문왕으로 즉위하면서 영자초 또한 부인 조희 및 여불위와 사이좋게 진으로 돌아와 태자가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펄펄하던 효문왕이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모든 의문을 덮고 드디어 영자초가 태자로써 왕위에 즉위하였으니, 그가 30대 장양왕이다. 참으로 사람 팔자 아무도 모를 일이다.

여불위는 자초의 후견인으로서 진의 승상이 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졌다. 여불위가 그토록 원하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제 천하에서 그 누구도 그를 넘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천하의 대국 진나라의 승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과연 여기서 만족할까?

또 다시 2년만인 기원전 246년 장양왕이 갑자기 죽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사마천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몇몇 재야사가들은 여불위를 의심하였다. 그 후 황태자 정이 13세로 왕위에 오르자, 여불위는 상국(相國)이 되어, 왕의 아버지에 버금가는 지위라는 뜻의 중부(仲父)로 불리며 왕을 도왔다.

새로 진나라 왕이 된 시황제 영정은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기에, 아버지 때에 승상이던 여불위가 섭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았다. 이제 자신의 세상이 되어버린 진나라에서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둘렀다.

당시 전국시대의 사군자라 불리는 각국의 유력자들이 수많은 식객을 모아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는데, 그들은 제나라 맹상군 전문, 조나라 평원군 조승, 위나라 신릉군 무기, 초나라 춘신군 황헐 등이다. 여불위 또한 자신의 집에 3천명의 식객을 불러들였고, 여불위 집안의 일꾼 숫자가 1만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당시는 유력자들이 식객을 많이 불러 모으는 것이 유행이었다. 해서 식객의 수는 바로 그 유력인사의 힘에 비례하였다. 유력자는 식객들을 평소 잘 모시다가 유사시에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그 식객 가운데는 훗날 진의 승상이 되는 천하의 이사도 있었는데, 그 재능을 일찍부터 눈여겨본 진왕 정이 그를 발탁해 먼 훗날 재상으로 삼았다.

천하통일을 이루는 진나라의 반석을 놓은 여불위는 승상으로 재임하는 동안 수많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여러 학문을 집대성한 책을 만들게 했다. 그 결과 제자백가의 학설뿐만 아니라 민간전설·민간요법·도교 등에 관한 백과전서인 <여씨춘추>를 펴냈다.

이때 여불위는 엉뚱한 객기를 부린다. 그는 완성된 <여씨춘추>를 진의 수도인 함양성 성벽에 진열해 놓고, “이 책에 적힌 글 가운데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천금을 주겠노라”고 했다. 이 일화는 훗날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그토록 치밀하고 심모원려의 여불위였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만든 업보에 빠지게 된다. 그는 과거의 애첩인 왕비 조희와의 인연으로 모든 공든 탑을 무너뜨리게 된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그런데 그의 꿈은 정말 진나라 승상까지였을까? 그가 막바지에 허우적댄 것은 그가 이루고자 했던 망상 때문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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