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천하통일 31] 전국시대 밝힌 맹자 ‘민본사상의 기수’
하늘은 백성이 보는 대로 보고, 백성이 듣는 대로 듣는다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도대체 전국시대 같은 살벌한 시대에 맹자 같은 인물이 왕들에게 군왕모독죄 혹은 내란예비음모죄 하다 못해 국가보안법 등등으로 사형당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게 신기하다. 그렇기 때문에 진나라 같은 곳에서는 그를 부르지도 않았고, 맹자 또한 가지도 않았다. 진나라 같은 ‘부국강병 철권국가’의 왕이 맹자를 용납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맹자도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고, 진나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맹자가 만약 진나라에 가서, 그의 지론대로 “왕이 시원찮으면 뒤집어 엎어버려도 됩니다!”라는 따위의 말을 했다간 즉각 죽음이었다. 그것도 단칼에….
맹자는 BC 372년, 전국시대 중기에 그 이름도 희미한 추(鄒)나라의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輿), 자거(子車), 또는 자거(子居)라고 하며,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에서 배웠다. 여러 나라에서 유세하며 다녔고 강태공의 양반 나라 ‘제’에서 주로 거했고 벼슬도 했다.
그는 소크라테스처럼 주로 문답법으로 왕들과 제자들을 교화시켰고, 당대의 제일 잘 나가는 사상가였다. 왕도정치를 강하게 주장하며 법가사상가들을 경멸했다. 특히 순자와는 정반대 논리를 폈다. 맹자는 양나라 혜왕과의 대화가 유명하다.
그의 민본주의 사상은 특히 이때 만천하에 드러났다. 양혜왕이 왕도에 대해 물으니, 맹자가 답한다. “서경書經에 이르길, ‘하늘은 백성이 보는 대로 보고, 백성이 듣는 대로 듣는다’ 했습니다. 군주가 그 의무를 게을리하여 백성들에게 원망이나 불평을 듣는 자는 마땅히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또 왕이 자리에 연연하여 독재를 하거나 백성들을 억압하려 든다면 살해되어도 무방합니다. 또한 사람의 본성은 어질기 때문에 통치자는 반드시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것이 왕도정치입니다. 왕도정치란 인의에 기초하여 공리주의를 물리치고, 백성들의 뜻에 따라 정치를 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사상을 가차 없이 군왕들 앞에서 피력하여,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모골이 송연했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부당한 권력에 대한 백성의 저항을 옹호하고, 왕의 권력은 백성들이 부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매우 진보적인 주장을 하였다. 맹자의 사상은 백성 본위의 사상이었다.
그는 전국시대의 법가적·패도적 부국강병 사상을 반대하고, 도덕적으로 정치하면 오히려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는 왕도정치를 말하였다.
양(梁)나라 혜왕(惠王)이 다시 맹자에게 물었다. “나는 나랏일에 정성을 다하는데 왜 백성이 늘어나지 않는 거요?”
맹자가 대답했다. “전투가 한창 중에 세가 불리하여 갑옷을 버리고 도망칠 때, 어떤 병사는 백보를 가서 멈추고, 또 어떤 병사는 오십보를 가서 멈추면, 오십보를 도망친 사람이 백보를 도망친 사람을 비웃는다면, 왕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도망치기는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렇죠.” “그 정도 선정(善政)으로 이웃나라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백성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마시오.”
양혜왕이 또 나라의 이익 되는 바를 질문하자 그가 답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꼭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다만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이 말씀하시기를, ‘어찌하면 내 나라에 이익이 있을까’ 하시면, 대부大夫는 말하기를, ‘어찌하면 내 가문에 이익이 있을까’ 할 것이고, 사士와 서민들은 말하기를 ‘어찌하면 내 한 몸에 이익이 있을까’ 할 것이니, 이같이 위, 아래가 서로 다투어 이익을 도모한다면,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힘으로써 사람의 복종을 얻었다면 이는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을 얻은 것이 아니고, 다만 굴복당하는 자의 힘이 약해서입니다. 덕으로써 사람의 복종은 얻었다면 이는 마음에서 비롯된 기쁨에 근거한 참된 복종을 얻은 것이니, 일흔명의 제자가 공자께 복종한 것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맹자는 언제나 당대 제후들의 부국강병 정책을 패도覇道로 규정지었고, 옛날의 성왕聖王들이 행하였던 왕도王道로의 회귀를 주장하였다. 또 그 왕도의 실천덕목으로 인과 의를 제시하였다.
사마천은 사실 이러한 맹자의 주장이 당대 군주들에게는 무척 황당하게 들렸을 거라며, 군웅할거의 전국시대에 그의 왕도정치론은 법가와 군현제 같은 부국강병의 정치철학의 사상에 눌러 기를 펴지 못했다 했다.
사마천은 더 나아가 <맹자>라는 책은 사실상 맹자의 실패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당대에 맹자는 의외로 전국적인 스타로 제왕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여불위의 부친도 그를 후원했다. 맹자가 한번 지나갔다 하면 주변 군주들이 거액의 노잣돈을 주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맹자가 제나라를 떠나서 추나라로 돌아갈 때, 지나가는 길에 있던 송나라와 설나라의 군주들은 맹자에게 황금 수십근을 노잣돈으로 주었다.
이는 맹자의 천부적인 스타 기질과 철학적 지성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맹자의 언어는 가히 당대의 스타답게 톡톡 튀었으며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상상을 절하는 파격의 언어를 구사하였다. 그의 행동도 꼬질꼬질한 서생의 모습이 아닌 멋쟁이 쾌남아의 모습이어서 인간적인 매력이 넘쳐났다.
맹자는 사단(四端)으로 인간의 마음을 설명했다. 사단이란 4개의 마음씨를 말한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어짊의 시작이요(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단야仁之端也),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로움의 시작이요(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지단야義之端也),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시작이요(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지단야禮之端也),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혜의 시작이다(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지단야智之端也)” 즉 인간은 원래 이같은 4단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한다.
맹자의 유교적 민본주의民本主義를 말할 때, 우리는 언제나 다음 말을 떠올린다.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社稷(나라)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다.”
이 때문에 백성의 신임을 얻어야 천자가 되고, 천자의 신임을 얻어야 제후가 되며, 제후의 신임을 얻어야 대부가 되는 것이다. 왕이 그 사직을 위태롭게 한다면, 곧 갈아치운다. 천하에 가뭄과 홍수가 일어난다면, 곧 사직을 갈아치우면 된다.
“하늘은 백성이 보는 대로 보고, 백성이 듣는 대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