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 25] ‘보은 아니면 보복’ 범저가 깨달은 ‘멈춤의 지혜’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사마천은 진나라 재상 범저(범수)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재상 범저는 단 한 끼의 식사에 대한 은혜에도 반드시 보답하였고, 한번 노려본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하였다. 범저는 출중한 인물인 동시에 가슴 속에 한이 많이 쌓여 있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조금만 잘해줘도 매우 고마워했고, 약간만 기분 나쁘게 해도 원수로 여겼다.
그 옛날 관직에 오르기 전 범저가 위나라의 수고라는 중대부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제나라 사신으로 가는 수고를 도와줬다가 오히려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수고가 이번에는 진나라에 사신으로 왔다. 그 이유는 진나라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풍문이 돌았기 때문에, 진 조정에 전쟁을 피하기 위한 유세를 하기 위해서다.
범저는 이 사실을 보고 받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즉시 수고에게 찾아간다. 범저의 장난기가 발동한 것. 그는 옛날과 다름없이 볼품 없는 행색으로 변장하고 사신인 수고 앞에 나타난다. 예상과는 달리 수고는 그를 반기며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범저는 비실거리며 그냥 조정의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이에 수고는 범저에게 좋은 옷을 사주며 너무 기죽지 말라고 격려한다.
아! 수고의 이런 무의식적인 선의가 그의 목숨을 살리게 된다.
수고는 무시무시한 진 나라의 재상을 만나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 없겠냐고 범저에게 사정사정한다. 범저는 망설이지 않고 시원스럽게 대답하기를, 자신이 마침 그분을 잘 알고 있으니 걱정 말라며 당장 그를 만나러 가자고 한다. 범저가 마부가 되어 수고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대문 밖에서 기다리게 해놓고 먼저 들어간 범저가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수고는 경비에게 물었다. 경비는 ‘여기가 진나라의 재상집이며, 아까 집안에 들어가신 그분이 우리 진나라의 재상이신 장록 대부인데요’
수고는 아찔함으로 휘청거렸다. 그가 천하의 대장군 백기까지 죽인 무시무시한 진나라의 재상이라니! 자신과 위왕이 옛날에 그에게 한 짓이 떠올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제 위왕과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이윽고 집안으로 불려간 수고는 온몸에 땀을 흘리며 무조건 엎드려 싹싹 빌었다.
‘저와 위나라 왕이 인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때 한 짓은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 속죄해도 모자랍니다’라며 수고는 이마를 수없이 바닥에 찧으며 피가 낭자하도록 자신의 죄를 빌었다. 범저는 무서운 얼굴로 과거의 치욕을 되새긴다. 한참 후 범저가 수고와 위제의 죄를 논고한다.
‘네놈들의 죄목은 세 가지다. 첫째, 너는 나에 대한 시기심으로 위제에게 나를 제나라의 첩자라고 모함했다. 둘째, 위제가 나를 죽도록 패고 더러운 화장실에 버렸을 때 그냥 보고만 있었다. 셋째, 손님들이 나에게 더러운 오줌을 갈겨댈 때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니놈들이 살기를 원하느냐?’
수고는 한나절 눈물 콧물을 다 흘려대고 이마에는 피가 낭자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이윽고 범저는 ‘네가 좀 전에 나에게 그래도 옛정을 보여 비단옷을 사주었으니, 네 목숨은 살려준다. 그러나 위나라 왕에게 전하여라. 즉시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잘라 가져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허물고 만흔 사람들을 몰살시키겠노라!’라고 나직하면서도 준엄하게 말했다.
수고는 위나라로 뛰어가 즉시 위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기겁한 위제는 조나라의 평원군에게 도망쳤다. 범저의 성격과 과거를 잘 알고 있는 진 소양왕은 어떻게든 그 원한을 풀어 주고 싶었다. 범저가 원한을 품고 있는 위제가 조나라 평원군의 식객으로 가있는 것을 안 소양왕은 평원군을 진나라로 소환하여 위제를 죽이라고 협박한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어처구니 없게도 평원군은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열 받은 소양왕이 이번에는 조나라 효성왕을 위협한다. 결국 효성왕은 군사를 내어 평원군 저택을 포위하지만, 위제는 조나라 재상 우경(虞卿)과 함께 도망쳐서 위나라의 신릉군에게 도움을 청한다. 신릉군은 진나라를 무서워하여 위제를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했지만 일단 국경까지 맞이하러 나간다. 그러나 공포에 질려 있는 위제는 신릉군이 자신을 만나러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에 낙담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한숨 돌린 효성왕은 위제의 목을 진나라에 바치고, 평원군은 해방되었다.
지금 말하는 평원군과 신릉군 등은 후에 자세히 말할 것이지만, 전국시대의 4군자라 한다. 그들은 제후는 아니지만 그 못지않은 세간의 평판과 영향력을 가진 유명인사들로 식객들이 각자 3천 이상이었다 한다. 당시 식객수는 곧 그 집주인의 평판의 크기였다.
범저는 자신을 추천해 준 왕계를 소양왕에게 다시 추천해 하동태수로 임명하였으며, 위나라를 탈출할 때 도와준 정안국을 추천하여 장군으로 임명하였고, 이외에도 가난하게 살 때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일일이 찾아가서 보답하였다. 범저의 성품이 이러하였다.
범저가 한창 잘나갈 때, 같은 유세가 출신의 친구 채택(蔡澤)이 찾아왔다. 그는 범저에게 뜬금없이 그 옛날 천하를 주름잡던 선배 재상들 이야기를 해준다. 상앙(商?)이 변법으로 진나라를 융성케 하였지만, 그의 엄한 법으로 너무도 많은 백성들의 피를 흘리게 하였고 자신의 원칙으로 참혹하게 온 집안이 죽은 얘기 하며, 풍운아 오기(吳起)가 그토록 추구하던 혁신과 병법으로 결국 배반 당해 죽은 얘기 등등.
채택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하는 말은 자명하였다. 이제 잘나갈 때 그만 하라는 뜻이었다. 친구 채택의 충고에 범저는 홀연히 깨달았다. ‘멈춤의 지혜’를 문득 깨달은 범저는 갑자기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재상자리에서 내려와 은둔생활로 자연을 벗하며 여생을 보냈다. 마지막까지 현명한 선택을 한 범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