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 18] 중국 최초의 시인 굴원 ‘이소’를 노래하다

중국 최초의 시인이자 비극의 시인 ‘굴원’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연횡책의 기수 장의가 초나라를 공략할 때였다. 장의는 초와 제의 합종을 깨기 위해 초나라 왕에게 거짓유세를 한다. 만약 초가 제나라와 맺은 합종을 깨면 상(商)과 오의 땅 600리를 바치겠다고 한 것. 물론 거짓말은 탄로 났고 오히려 초나라는 제나라의 신의만 잃어 곤경에 처한다. 합종이 깨지자 진나라와 제나라 연합군은 초를 공격하여 초의 요지 중의 요지 단양과 한중을 빼앗는다.

장의에게 속은 초나라 왕. 진의 혜문왕이 초의 검중 땅을 탐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바로 이때다 싶어 “진왕께서 원하시는 검중 땅을 장의와 맞바꾸면 어떻습니까?”고 간했다.

물론 철천지 원수 장의가 오면 한 칼에 죽여 버리려고 한 것이다. 욕심 많은 진나라 혜문왕이야 내심 장의를 보내 땅을 얻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의가 누군가? 장의는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자청해서 진왕께 말한다.
“왕이시여,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신이 폐하의 신표를 가지고 사신으로 초로 가겠습니다. 설령 신이 죽더라도 우리 진나라가 초의 검중의 땅을 차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라고 했다. 과연 장의다. 문제의 핵심을 그대로 선수치고 들어간다.

장의는 진 혜문왕의 마음을 이렇게 얻어놓고 초로 향한다. 장의가 도착하자마자 초나라 왕은 즉각 그를 가두고 죽이려 한다. 그러나 장의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초왕에게 유세한다.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그대로 황천길 행.

“초의 대왕이시여, 무슨 지난 일을 가지고 원한을 가지고 계십니까? 제 말씀을 다 들으신 다음에 판단하십시오. 지금 같은 난세에 군주의 판단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진은 호랑이고, 다른 나라들은 양떼에 불과한데, 어떻게 호랑이와 손잡지 않고 양떼들 편에 섭니까? 유사시 진의 군대가 초에 오기로 한다면, 파촉에서 배를 띄워 내려오면 열흘이면 족한데, 언제 다른 제후국들의 도움을 받겠습니까?”하며 초왕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얼레고 겁준다.

“소진의 합종책은 사실 서로 돕는다고 하면서 틈만 보이면 배반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진나라와 초나라가 연횡하여 태자를 인질로 교환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도록 다리를 놓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서로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때 오늘의 주인공 초나라의 대부이며 만고충신의 표상 굴원(屈原)이 등장한다. 그는 초나라가 또 남의 땅을 욕심내어 장의에게 속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전에도 장의에게 속았는데, 그의 말을 또 들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장 장의를 삶아 죽여야 합니다!” 라고 충언했다.

굴원은 오랑캐 나라 진이 아니라 올곧은 양반 나라 제나라와 힘을 합쳐야 초가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초회왕은 굴원의 충언을 듣지 않았다. 순진무구한 서생 굴원과 달리 장의는 초회왕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탐욕스런 초회왕을 공략하는 데는 이익이 우선이었다. 회왕은 일단 장의를 그대로 돌려보내면 약속한 검중 땅을 진에게 떼어 주지 않아도 되며, 장의가 오히려 힘을 합쳐 약한 나라들을 잡아먹자고 유혹하니 회왕은 또 장의의 말에 속아 넘어가고 만 것이다.

결국 조국 초나라의 멸망을 예감한 굴원은 극심한 좌절 속에서 산천을 헤메고 번민하다가 그만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고 만다.

이제 초나라의 충신, 중국 최초의 시인, 비극의 시인 굴원(屈原)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굴원은 삭막하고 살벌한 전국시대에서 홀로 꽃피는 설중매 같은 존재였다.

사마천은 그의 ‘사기(史記)’에서 굴원의 생애를 말하며 동병상린의 안타까운 심사를 이렇게 토로했다.

“굴원의 일생은 흙투성이 허물을 벗고 매미가 빠져나오는 듯한 삶이었다. 혼탁한 세상에서 빠져나온 듯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살아간 사람이다.”

기원전 4세기말 굴원은 쓰러져가는 풍전등화의 조국을 슬퍼하며 노래한 시인이었다.

진나라의 대부이며 천하의 유세가인 장의의 농간으로 초나라 회왕이 그의 탐욕으로 나라를 망치는 꼴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굴원은 낙담한다.

그는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노래로 심경을 토로한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시로서 중국인 모두가 현재까지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그의 시, ‘이소(離騷)’부터 감상한다.

已矣哉國無人兮莫我知兮
아 끝인가? 나라에 인물이 없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네.

又何懷乎故都
나는 또 어찌하여 옛 도읍지를 그리워하는가?

旣莫足與爲美政兮
이미 함께 뜻을 펼칠 사람 없는데

吾將從彭咸之所居
나 이제 팽함(彭咸)을 좇아가리라.
-굴원의 시 ‘이소’ 중에서

팽함은 은나라의 현자로, 왕에게 자신의 뜻을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강물에 몸을 던졌다. 굴원도 그처럼 조국을 위해 몸을 던질 각오를 드러낸 것. 굴원은 결국 팽함의 뒤를 좇아 멱라수에 몸을 던졌다.

‘이소’란 ‘걱정거리를 만난다’라는 뜻이다. ‘이소’는 굴원의 사상과 삶이 집약된 대표작으로 장장 375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다. 이백, 두보, 도연명 등 당대의 시인들이 시대를 넘어 그를 추종했다. 다음편은 가장 유명한 굴원의 ‘어부사’를 감상하기로 한다.

One comment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