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발산기개세’ 영웅 항우의 로맨스 그린 ‘패왕별희’
[아시아엔=강철근 국제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나는 첸카이거 감독의 영화 <패왕별희>를 20세기 최고의 영화로 꼽는다. 과연 중국의 힘이다. 장국영과 공리, 두 사람의 신들린 연기는 가히 연기신의 모습이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는데 力拔山兮氣蓋世
때가 불리함이여 추도 달리지 않누나 時不利兮?不逝
추마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거나 ?不逝兮可奈何
우여, 우여, 너를 어찌해야 할꼬 虞兮虞兮奈若何
노래 속에서의 패왕은 물론 항우, 희는 우희, 추는 항우의 천하명마 오추마, 사면초가와 우희의 애절한 노래와 춤···.
<패왕별희>는 항우와 그 애인 우희의 처절한 이별이야기를 영화화했다. 막강했던 항우의 초나라 군이 한신의 한나라 군에 초토화되고, 백만 대군을 잃고 오직 친위대 병사 28명만 살아남아,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항우.
마지막에 항우가 우희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는 장면을 경극 <패왕별희>로 승화시켰다.
기원전 202년, 길고도 긴 5년간의 전쟁을 끝내고 마지막 해하전투에서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 패권을 차지한 한고조 유방. 그러나 천하통일의 유방보다 오히려 후인들의 가슴을 치는 천하 영웅 항우 이야기가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멋있다. 마치 왜국의 천하통일의 장본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훨씬 일본인들 가슴 속에 살아있듯이 말이다.
해서, 수천년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경극의 주인공은 당연 유방이 아닌 항우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유방은 천하의 잡놈, 항우는 지극한 단심의 로맨티스트다. 유방이 평생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리고 여러 여자를 거느린 반면, 항우는 평생 우희 한 여자만 사랑했다.
진나라 말기, 진승과 오광의 농민반란 후 BC 206년 천하제일 황제국 진(秦)나라가 멸망한 이래, 초패왕 항우(項羽)와 한왕 유방(劉邦)이 천하를 다투면서 5년 동안이나
싸움을 한다. 항우는 24세에 거병해 31세에 자결, 유방은 38세 거병에 45세 한나라를 건국했다. 항우는 7년간 70회 전투 전승, 마지막 오포강 전투에서 대패했다. 거병한 기간 7년, 초한이 싸운 기간 5년이다.?7년간의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친 쌍방은 싸운 지 4년째 되는 해의 가을,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휴전협정을 체결한다.
홍구의 동쪽을 초나라 영토로, 서쪽을 한나라 영토로 하며, 항우가 인질로 잡고 있던 유방의 가족들을 돌려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휴전협정이다. 항우는 사나이 약속대로 동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이런 면에서 좀(실은 아주 많이) 치사한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계책에 따라 협정을 위반하고 항우를 뒤에서 공격한다. 열 받은 항우는 해하에 진을 치고 한군과 대치한다. 항우는 평소 유방을 싸움 상대가 안 되는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치부하여 무시하기 일쑤였다.
“유방, 너 같이 하찮은 놈이 감히 나를 상대로 사기를 쳐?” 이때 항우의 군사는 10만, 한나라 군사는 명장 한신(韓信)이 이끄는 30만 대군, 유방의 20만 대군, 팽월의 3만, 경포와 유가의 군사를 모두 합쳐 60만 대군이었다. 주력은 한신의 군대였다. 천하를 놓고 진검승부를 펼치는 건곤일척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쟁 내내 연전연승 해온 항우는 한나라 유방군을 얕잡아 보고 우습게 여기다가 한신의 전술전략으로 생전 처음 대패를 거듭한다. 한나라 군대는 항우의 군대를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항우의 군대는 한군에 물 샐틈없이 포위된 데다 군량마저 떨어져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느날 밤,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랫소리(四面楚歌)가 들려왔다. 장자방의 책략에 의해 한나라 군사들이 펼친 심리전이었다. 초나라 군사들은 서서히 감성적으로 되어 고향을 향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항우는 초나라 군사들이 한군에게 모두 항복한 줄 알고 그만 낙담하고 만다. 혈기만큼이나 포기도 빠른 항우다.
항우는 자신의 운이 다했음을 직감하고는 비탄에 젖어 노래를 불렀다. 옆에는 항상 그를 따르던 사랑하는 여인 우미인(虞美人)과 명마 추(?)가 있었다.
궁지에 처한 항우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8백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포위망을 뚫었다. 하지만 회하를 건넌 후 남은 군사는 1백여명뿐. 이들은 음릉에 이르러 그만 길을 잃고 말았는데, 이미 백성들에게 인심을 잃은 항우인지라, 그를 돕는 사람은 없었다. 항우 일행은 지나는 한 농민에게 속아 왼쪽 길로 도주하다가 늪을 만나 시간을 허비하고, 다시 되돌아와 동성에 이르렀을 때는 고작 28명이 남아 있었고, 수천의 추격군과 마주치게 된다.
항우는 28명을 4대로 나누어 돌진하여 수없이 많은 한군을 사살하고 다시 뭉쳐 포위망을 뚫고 계속 동쪽으로 도주했다.
이 전투가 바로 유명한 동성쾌전인데, 여기에서 항우는 부하를 단 2명 잃었을 뿐이다. 치열한 전투 끝에 오강(烏江)에 이른 사람은 고작 26명. 오강의 정장이 배를 대놓고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항우를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인사 중의 한사람이었다.
“영웅이시여! 강동이 작다고는 하지만 아직 천리 땅이 있고 몇십만 백성이 있으니 왕업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빨리 강을 건너십시오. 지금 저만이 배를 가지고 있으니 한나라 군대가 와도 강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항우가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나를 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강을 건너겠는가. 또한 내가 강동의 자제 8천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한다. 설령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동정하여 왕으로 삼아 준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볼 수 있겠는가. 설령 그들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 마음이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정장에게 자기가 타던 오추마를 선물했다. 추격해온 한군의 대군과 부하 몇 명과 함께 마지막 단말마적인 치열한 접전 중에 항우는 옛 부하였던 한의 장군 여마동을 발견하고, 1천금의 상과 1만호의 봉읍이 걸린 자신의 수급을 바쳐 공을 세우라고 소리쳐 말하고 자결하고 만다.
이로써 일세영웅 항우는 장렬하고도 처절한 최후를 맞았다. 항우 나이 31세 때였다. 왕예라는 인물이 항우의 목을 베어가졌고, 여마동 등 4인은 항우의 사지를 갈라 가져갔다. 이들은 같은 날 후(侯)에 봉해졌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