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채용되는데 300달러, 군대 면제받는데 300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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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김중겸 전 경찰청 수사국장] 미국 민주당 지구당 사무소에 누가 찾아왔다. “경찰관 취직 좀 시켜 주세요.” “누가 보냈어?” “존존 존스씨입니다.” “알았어. 3백 달러 가져 왔지? 이리 내.”

경찰관 채용 열쇠는 연줄(connection)과 당파(黨派)다. 취직이 돼 경찰서에 간다. “어디 아프다고? 소학교도 안 나왔다고? 이름은 쓸 줄 알지? 그럼 됐어.”

순경교육도 받지 않고 배지와 경찰봉을 받는다. “자네가 근무할 순찰구역(beat)는?브루클린 13일세. 거기 지역담당 경사(sergeant)에게 신고해. 바로 가게.” 임용 완료되고 근무가 시작된다. 1800년대 뉴욕시경 모습이다.

공장 근로자 연봉 3백 달러, 순경 9백 달러. 경찰관 되었다는 건 출세 즉 신분상승 증거였다. 대도시는 어디나 다 이런 상태. 공화당이 선거에서 이기면 민주당 때 채용자는 몽땅 날아간다.

군대 면제받는데?3백 달러

남북전쟁 때 남북은 지원병을 놓고 다퉜다. 전쟁이 길어지자 남북 모두 병력이 모자랐다. 북군 모병관은 유럽 출장을 가 “입대 지원하면 이민허가 자동이다” 하며 미끼를 던졌다. 너도나도 물었다. 살러 가서 죽고 죽이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부족하자 징병제를 도입했다. 징집면탈 구멍은 어디나 존재한다. 남이나 북이나 사람 사서 대신 입대시켰다. 북부는 노동자 1년 소득인 3백 달러를 정부에 내고 면제받았다. 남부는 노예 20명 내고 안 갔다. 노예는 현찰이었다.

부자들이 일으킨 전쟁에 빈자들이 나가 싸웠다. 돈 없고 힘없는 이들만 죽었다.

1863년 7월 12일 뉴욕. 1차 징집자 명단과 게티즈버그 전사자 명단이 나왔다. 대부분 돈 없는 아일랜드와 독일 사람이었다. 하루살이 품팔이로 연명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벅차다. 그런데 군대 가서 죽으라고! 내 가족은 굶어 죽으라고! 없는 설움이 폭동으로?번졌다.

돈 없으면 군대 가야 한다. “내 자식과 마누라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부모는 누가 모시나?” 분노로 이어졌다.

1863년 7월 13일 월요일. 2차 징집자 명단이 발표됐다. “또 우리 아일랜드 사람이다!” 가슴 속 응어리 진 불덩이가 폭발했다. 바로 뉴욕폭동이다! 공화당 인사를 습격하고 신문사와 경찰서를 파괴했다. 나흘 동안 계속됐다. 군대가 동원돼 진압했다.

이 사건은 북군에게 커다란 상처 입혔다. 12만명이 징집 기피하고 9만명은 캐나다로 갔다. 3만명은 헌병 손길이 미치지 않는 심심산골로 들어갔다. 탈영병은 20만명에 달했다.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한국전쟁 때 최하소득계층 미군 전사율은 최상층의 4배에 이르렀다. 흑인 전사율은 백인의 2배. 우리네도 그때 있는 집 자식들은 미국유학 갔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다. “부자가 전쟁 일으키면 죽는 건 가난한 사람이다.”(When the rich wage war, it is the poor who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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