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 Jang의 호주 이야기⑨] 호주는 왜 ‘백호주의’를 포기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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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장영필 <아시아엔> 호주특파원] 해외로 이민 가려는 이들에게 호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호주는 이민자의 나라”이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1730년경 영국인들이 호주를 발견했을 때부터 호주 대륙에 살았던 호주 원주민들(Aborigne)을 제외하면, 현재까지 호주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이민자 혹은 이민자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호주 사회에서 이민자 혹은 이민정책이 주는 사회적 함의는 매주 중요하다. 먼저 넓은 대륙에 비해 현저히 적은 인구로 ‘자주국방’의 문제가 있다. 이민자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가치다. 호주 사회 초창기, 즉 호주가 영국의 죄수들을 처리하기 위한 바다 건너 식민지 중 하나로 인식되던 시절에는 이런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다.

통계에 의하면, 1828년 호주에서 가장 큰 주인 뉴사우스웨일즈(NSW) 인구가 36,598명이던 시절, 영국에서 보내져 온 죄수들 수는 15,728명이었다.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였다. 즉 오늘날의 호주대륙과 다르게 그 시절 호주는 시드니 지역을 중심으로 죄수 혹은 형기를 마친 자유정착민, 그리고 일부 정부관리로 이루어진 소규모 사회였다.

1850년대 초, 호주 역사에서 가장 큰 분기점이 된 광산시대(Gold Rush)가 시작되었다. 광산에서 한몫 챙기기 위해 영국을 비롯, 해외로부터 대규모 인구유입이 시작됐다. 동시에 얼굴 생김새는 비슷해도 언어가 달랐던 각종 유럽인들이 많아지면서, 점차 호주 사회는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된다. 호주의 이민 역사를 다룬 <또 다른 호주>(The Other Australia)의 저자, 브라이언 머피(Brian Murphy)는 “이때부터 호주 사회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치세력이 생겨났다”로 했다.

img_7477-21838년, 영국정부는 호주로 꾸준히 보낸 죄수 송출을 중지한다. 여기에는 당시 산업화가 시작된 영국사회에서 노동력이 필요한 것과 함께 바다 건너 또 다른 영국 식민지인 호주 사회가 불량 죄수들로 인해 혼탁해지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1850년대 금광붐은 양질의(?) 영국인들에게만 기회를 준 건 아니었다. 당시 시드니항구에 각종 화물을 내려놓은 영국 상선들은 귀향 길에 중국에 들러, 중국 차와 찻잔 즉 본차이나라고 하는 도자기를 구입해 본국으로 향했다. 이것을 계기로 중국인들이 호주를 알게 되어, 시드니에는 중국 노동자들이 넘쳐났다. 이때부터 호주로 유입된 중국 노동자들은 꾸준히 증가해 1901년에만도 벌서 5만명에 이른다. 반면 일본노동자들은 3000명 남짓(3167명)에 그친다.

중국계를 비롯한 아시아계 노동자뿐 아니라 북미 지역 출신들도 늘기 시작하였다. 호주 사회의 당시 주류세력이던 영국계 정부관리들은 이들에 대해 “백인이지만 영국계는 아닌”(white but not British) 이민자로 규정한다. 하지만 아시아계 노동자들을 대하는 것만큼 배타적이지는 않았다.

1901년 통계에 따르면, 당시 인구의 90%는 영국계, 5%는 북유럽, 4%는 아시아계, 1%는 남유럽 및 기타 지역출신이다. 비영국계 이민자가 점차 늘자 영국계 호주 정부 관리들은 1870년대부터 서서히 ‘선별적 이민정책’(selection and nomination)을 실시한다. 특히 호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준비하는 1890년대부터 영국계 백인들은 오늘날 영연방 국가를 뜻하는 ‘커먼웰스’(Commonwealth)라는 단어를 ‘호주의 영국인’(Australian Britain)인 것으로 각인시키면서, 자신들이 호주 사회의 주체세력임을 강조한다. 그 연장선에서 1898년 시드니의 한 신문은 ‘백인중심의 호주’(White Australia)라는 단어를 유행시킨다. 이른바 ‘백호주의’(白豪主義)가 그것이다.

img_7478이런 사회 움직임이 일게 된 데에는 1880년 남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보어전쟁(Boer War)에서 네덜란드군과 싸우기 위해 영국군의 일환으로 처음 해외 참전을 해야 했던 호주시민군 구성 때 호주 태생 혹은 영국출신으로만 참전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즉, 이때부터 국적(Nationality)의 개념이 호주 사회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 당시 국제정치 역학구도에서 중국과 일본의 부상을 견제하고자 헀던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이론을 만든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영국의 인류학자·정치학자)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호주인들로 하여금 ‘아시안을 경계하는 두려움’ 즉 황색공포(Yellow Perils)를 낳게 하였다.

오죽하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두고 당시 수상이던 알프레드 데킨(Alfred Deakin)은 일본을 두고 ‘고등의 능력을 가진 이들’(high abilities)이라고 지칭했을까 싶다. 그 결과, 1901년 이민제한법안(Immigration Restriction Bill)이 제정된다. 법안 제정 당시 호주정부가 대외적으로 내건 제정 의도는, “비백인계 특히 아시아계들로부터 호주 사회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속내는 노동시장에서 아시아계가 늘어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구체적 방법으로 1901년 비백인계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받아쓰기시험(Dictation Test)이 실시된다. 반면, “가재는 게편”이라는 한국속담처럼, 한때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계 이민자들에게는 1922년 받아쓰기 시험을 폐지한다. 이는 호주 노동시장에서 인도계가 늘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가 된다. 받아쓰기 제도는 1958년 폐지되나, 훗날 국제적으로 호주를 백호주의(White Australia)의 나라로 각인시키는 데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장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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