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과 ‘채근담’은 도인의 면모를 어떻게 표현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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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노자의 <도덕경> 제15장에는 도인의 여러 면모를 다양한 비유를 통해 설명했다.

제1절, 도인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도를 체득한 옛사람은 미묘현통(微妙玄通) 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깊이가 있으면 벌써 바닥난 사람이다. 도인은 깊이가 없다. 있어도 한이 없으니 없는 것이다. 그 미묘하고 어두운 것에 통달해 있으니 살아도 보통사람과는 같지 않다.

제2절, 도인은 평범 이하의 사람으로 보인다. 우리가 보는 도인의 모습은 빙산의 일각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드러난 일부를 더듬어 도인을 짐작해보는 정도다. 그 모습은 ‘머뭇거리고, 주춤하고, 조심하고, 풀어지고, 소박하고, 텅 비고, 혼탁하다’. 도무지 멋지고 화려한 게 거의 없다. 잘 날 것 없는 촌뜨기처럼 보이는 것이다.

천도교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은 도 닦는 사람은 “우(어리석게), 묵(조용히), 눌(말에 서툰 듯) 하라”고 했다. 노자의 도인과 어긋나지 않는다. 진짜 도인의 모습은 미묘하고 어두워서 중생은 감히 알아 볼 수가 없다. 외부로 나타난 모습을 가지고 함부로 도인을 평가하는 것은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다.

제3절, 탁한 물을 맑아지게 만든다. 누가 탁한 물을 고요히 하여 맑아지게 할 수 있을까? 누가 가만히 있는 것을 움직여 생생 약동하게 할 수 있겠는가? ‘탁한 물’을 맑게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움직여 살아나게 하는 것이 곧 도이고, 자연이며, 시간이니 무위의 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탁한 물’과 ‘가만히 있는 것’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곧 도인이다.

제4절, 도인은 채우기를 바라지 않는다. 도인은 욕심이 없다. 도인이라면 탁한 물은 그냥 탁한 물이고, 맑은 물은 그냥 맑은 물이다. 그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인위성과 가치판단이 없다. 마음 속에 선악도 시비도 없다. 그래서 채우려는 마음이 애초 없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사랑도 그 무엇도 도인을 움직이게 하지 못한다.

이렇게 우주의 진리를 크게 깨친 사람을 대각도인(大覺道人)이라 하고 부처라 하는 것이다. 소각(小覺)이 쌓이면 대각이 된다. 그러므로 아직 대각을 이루지 못한 범부중생일지라도 끊임없이 수행하고 닮아가려고 노력하면 불보살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채근담>에 나오는 도인의 모습을 보자.

“매(鷹)는 앉아 있으나 조는 듯하고, 범(虎)은 걸어가지만 병든 듯하니,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사람을 붙잡아 두고 사람을 내 사람으로 쓰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참됨을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내지 않고, 재주를 나타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곧 어깨가 넓어 세상의 큰 짐을 짊어질 수 있는 도인의 역량이다.”

“도인은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시비를 걸어 이길 생각도 없고, 다투어 싸울 생각도 없다. 힘겨루기를 해 승패를 짓자는 것은 속이 좁은 탓에 빗어지는 허세일 뿐이다. 허세는 과시하기를 좋아하고, 과시하다 보면 속빈 강정처럼 부서지고 만다.”

“겸손은 약해 보이고 오만은 강해 보인다. 그러나 겸손함이 오만함을 이겨낸다. 그래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이다. 마음이 넓고 깊은 사람은 알아도 모른 척하며, 재주를 과시해 자기를 돋보이려 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 겸허하고 겸손할 뿐, 할 일이면 성실히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면 물러난다. 이러한 처신이 큰일을 두 어깨에 짊어지는 도인의 역량이다.”

우리가 서원을 세우고 수행할 때 도인의 삶을 이룰 수 있다. 도인이 되는 수행방법을 삼학(三學)이라 한다.

첫째, 정신수양. 정신이라 함은 우리의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를 이른다. 수양은 안으로 분별심을 없이 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사리연구. 사(事)라 함은 인간의 ‘시비이해’(是非利害)’를 이름이요, 이(理)라 함은 천조(天造)의 ‘대소유무’(大小有無)를 말한다. 또 대(大)라 함은 우주만유의 본체를 이름이다. 소(小)는 만상이 형형색색으로 구별되어 있음을 말한다. 또 유무(有無)라 함은 천지의 춘하추동과 ‘풍운우로상설’(風雲雨露霜雪)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흥망성쇠의 변하는 모습을 말한다. 그리고 연구는 사리를 연마하고 궁구(窮究)함을 말한다.

셋째, 작업취사(作業取捨). 작업이라 함은 무슨 일에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작용함을 이른다. 취사(取捨)라 함은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는 것이다.

이 삼학을 수행하면, 정신이 철석같이 견고해지고, 천만 사리를 분석하고 판단하는데 걸림이 없게 된다. 또 모든 일을 응용할 때에 정의는 용기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하게 버리는 힘을 얻어 바로 도인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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