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만의 대중음악산책] 일제가 금지한 저항적 예술가곡 ‘봉선화’
울 밑에선 봉선화야
우리는 보통 한국대중가요의 전성기를 1960년대로 생각한다. 이는 방송의 발전, 특히 텔레비전 방송국의 개국(1961년 KBS, 1964년 TBC, 1969년 MBC),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국 주둔과 함께 태어난 팝송, 미8군 쇼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일제강점기부터 유행해왔던 트로트의 부흥과 함께?우리의 극장문화를 발흥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보다 앞선 1920년대를 첫 번째 한국대중가요의 전성기로 기록하고 싶다.?가곡과 동요로 대표되는 순수예술과 유행가·민요로 상징되는 대중예술이 공존하며 발전했기 때문이다. 민요, 신민요, 판소리, 가곡, 동요, 애국가, 군가, 찬송가 등 음악적인 양식도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은 과도기였으나 김인식, 이상준, 김영환, 홍난파, 김형준, 윤심덕 등의 음악가들에 의해 유행창가의 모습으로 나타난 유행가는 1920년을 거치며 대중음악으로 기반을 잡았다. 전래민요가 창가의 영향을 받아 신민요로서 대중가요로 자리 잡았으며 서양의 재즈와 포크송 등이 유입되어?음악장르가 풍성하고 다양해졌다.
1920년 홍난파가 창작한 우리민족 최초의 예술가곡 ‘봉선화’가?연주됐고 1925년 홍난파의 음악적 친구인 김형준이 가사를 만들어?더욱 사랑을 받았다.
?????????????????????????? 봉 선 화
김형준 시, 홍난파 곡
??????????????????? 울밑에선 봉선화야
??????????????????? 네모양이 처량하다
??????????????????? 길고긴날 여름철에
??????????????????? 아름답게 꽃필적에
??????????????????? 어여쁘신 아가씨들
??????????????????? 너를반겨 놀았도다
담장이나 울타리 밑에서 여름부터 가을 사이 빨강, 자주, 노랑, 분홍, 흰색의 가녀린 꽃을 피우는 봉선화는 열매가 익으면 부풀었다가 터져 씨를 사방으로 뿌리는 모습이 일제침략에 끊임없이 저항하는?우리의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꽃으로 인식됐다. 예로부터 여성들이 손톱에 물을 들이며 “첫눈이 올 때까지?봉선화물이 지워지지 않으면 그 겨울에 시집 간다”는 속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져오는?꽃이다.
민족의 망국과 슬픔, 해방과 독립의 염원을 담아 격조 높게 노래한 봉선화는 널리 열창되었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에 의해 은밀히 애창되었다. 1932년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최명숙이 부른 ‘사공의 노래’와 같은 음반에 수록됐고 1936년 빅타레코드에서 소프라노 박경희의 노래로 발매돼 그해 4월16일 라디오방송에도 선곡됐다.
홍난파(1897~1941)는 44세 젊은 나이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그 다음해인 1942년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 출신인 소프라노 김천애가 동경의 히비야공회당 신인 음악회에 독창을 해 갈채를 받는 모습을 홍난파는 유감스럽게도?못 봤다. 그는 그해 가을 귀국하여 서울과 평양에서 봉선화를 다시 소개했다. 애절한 선율은 가슴을 저밀 듯 파고들어 빠르게 확산됐지만 봉선화는 일제당국에 의해 가사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금지되는 불운을 겪었다.
홍난파와 김형준이 만든 봉선화는 마치 그 모습이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과 닮아 민족의 노래로 현재까지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 풍진 세월
이 풍진 세월은 ‘이 풍진 세상을’ ‘탕자 자탕가’ ‘탕자 경계가’ ‘청년 경계가’ ‘절망가’ ‘실망가’ ‘희망가’ 등 많은 노래제목으로 유행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유행가요이다.
이 풍진세월은 3.1 운동 이후에 유행했으며 우리가요의 고전처럼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일본가요 엔카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당시는 일본의 엔카를 번안하여 부르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 노래의 원곡은 ‘마시로키 후지노네’로 알려져 있다. 탄생배경은?이렇다. 1910년 1월 23일 가마쿠라 앞바다 에노시마에 놀러갔던 즈시카이세이 중학생들이 돌풍을 만나 배에 타고 있던 남학생 12명 전원이 수장됐는데, 근처 여학교에서는?시찌리게하마의 애가 ‘새하얀 후지의 봉우리’를 부르며 애도?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됐다. 여학교 교사인 미쓰이 요코가 미국인 작곡가 제레미어 잉걸스(1764~1828)의 찬송가 ‘When we arrive at home (우리가 집에 돌아 왔을때)’ 멜로디를 사용했다. 또 거리의 악사 엔카시들이 부르면서 일본전역에 유행했고 이것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다시 한번 크게 유행했다.
??????????????????????????????이 풍진 세월
작자 미상, 작곡 제레미어 잉걸스
????????????????????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 같도다
???????????????????? 이 풍진 세상에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 ????????????????? 담소 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이 풍진 세월’은 연극의 막간에서도 불리며 초기 유행가의 시발점으로 널리 민중에게 유행됐다. 1925년 닙보노흥 측음기 회사에 의하면 박채선과 이류색이 악기 반주 없이 민요창법으로 이중 제창하여 불렀다. 이는 외국의 노래와 전통가요의 접합이 은연중에 이루어졌을 의미한다.
<오동나무 창가집>에는 ‘이 풍진 세월’이 ‘탕자경계가’라 불리웠으나 곡조가 지닌 애조와 현실도피는 퇴폐적 기풍의 가사 때문에 민중의 사기를 높이기보다는 절망감과 위기의식을 만들어 ‘실망가’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적으로 승화시켜 상업자본에 의해 레코드를 만들며 창작 신민요 및 유행가요로 바뀌어 민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25년 8월 신보(新普)로 김산월, 도월색, 이계월이 부른 ‘이 풍진 세상을’도 ‘이 풍진세월’과 가사만 다를 뿐 같은 노래이다. 1930년대 초 우리나라 최초의 유행가수 1호인 채규엽이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희망가’란 제목으로 취입해?애창가요가 됐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미국 유학생활에서 친숙해진 노래이며 그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1932년 조선의 세레나데라 일컫는 ‘황성옛터’가 대중적 인기를 얻어 본격적인 대중가요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가장 많이 불리운 노래가 바로?‘이 풍진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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