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만의 대중음악산책] 한국대중가요 뿌리는 초기 ‘천주교성가’

1779년(정조4년) 무렵 경기 광주군 퇴촌면 우산2리 산176번지 천진암에서 이승훈, 권철신, 정약전, 정약종, 권상학, 이벽, 이총억, 정약용 등이 모여 천주학을 주제로?모임을 가졌다. 이 젊은이들의 모임이 ‘강악회’다.

‘강악회’는 중국 북경에 들어왔던 천주교의 그리스도사상 연구가 목적이었다. 첫 모임에서 10일간 예배를 드렸고 그후 7년 정도 유지되다 박해와 순교로 해산됐다.

천주공경가

강악회는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쉬는 날로 정하고 이를 실천했는데 이것은 서양에서 일주일에 하루 쉬는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일,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이라는 일주일 개념이 도입되기 전이다. 7일 간격으로 하루씩 매월 4일 쉬었으니 지금의 주일개념이었다. 이들은 예배시간에 이벽 회원이 만든 노래를 함께 불렀다. 이 노래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사상을 담아 노래한 <천주공경가>다.

어화세상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집안에는 어른잇고 나라에는 임금잇네
내몸에는 영혼잇고 하늘에는 텬주잇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네
삼강오륜 지켜가자 텬주공경 으뜸일세

가사를 잘 보면 현재와는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천주에게 공경하는 노랫말은 유교사상과 그리스도사상이 잘 조화된 것이다.

<천주공경가>와 함께 <십계명가>도 예배시간에 불렀다. 정약전, 권상학, 이총억 등이 공동집필한 것이 <만천유고>(1779년)에 전한다. 만천은 이승훈의 호인데, <만천유고>는 천주교 도입과 관련된 인물들의 유고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기원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서양인 친구에게 영세를 받고 미사예절을 익힌 뒤 미사 관련 책자와 미사용품을 갖고 귀국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1784년으로 삼는다. 이벽 등은 이승훈 입국 후 친구 김범우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것이 바로 주일미사의 시작이다. 김범우의 집은 현재 명동성당 자리다. 1984년 교황 바오로2세를 초청해 한국천주교 200주년 행사를 공식적으로 거행한 연원이기도 하다.

한편 아펜젤러, 언더우드 등 공식적인 서양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조선인들이 설립한 개신교 공동체가 있었다. 1883년 5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소래교회가 설립돼 한글로 번안된 찬송가로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교회 교인인 서상륜, 서상조 형제는 중국을 오가며 인삼장사를 하던 중 1880년대 만주에 와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와 매켄타이어를 통하여 개신교를 접했다.

1882년 성경 등 개신교 서적을 갖고 오다가 검문에 걸려 투옥됐으나 탈출해 황해도 장연마을을 중심으로 서북지방에 개신교를 전파했다. 1886년 70여 명이 같이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도 있다. 1887년 초 서상륜 형제는 언더우드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새문안교회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서상조는 1901년 창립한 평양장로회 신학교회에 들어가 한국인 최초 목사 7명 가운데 1명이 된다. 경기도 양지 총신대신학대학원 교정에 1886년 증축한 소래교회의 두번째 예배당이 복원돼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 최초의 찬송가인 <천주공경가>와 소래교회에서 한글로 번안된 성경으로 예배를 드린 것은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한국천주교는 박해와 순교 등으로 시련을 겪으며 2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역사가들은 한국천주교를 ‘(1)유입시기 1784~1801년 (2)박해기 1802~1886년?(3)자유시기 1887년~현재’로 분류하고 있다.

교회음악은 초기 천주교회 성가와 그레고리오 성가 등 성가집 발행으로 크게 발전했다. 이는 이후 대중가요 발전에도 뗄 수 없는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