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만의 대중음악산책] 아! 아리랑

음악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가장 가깝고 친숙한 벗으로 일상 속에 긴밀하게 자리를 잡는다. 사회가 변하면서 음악 분야도 다양해졌지만 여전히 우리의 문화욕구를 충족시키고 생활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대중매체가?없던 과거에 음악은 우리 민족의?생활상과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삶의 일부였다. [대중음악산책]을 통해 서양음악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 문화로 자리잡게 된?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조명하고자 한다.

아 리 랑

1. 아리랑의 모양

우리 민요 중에 아리랑처럼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도 없을 것이다. 아리랑의 ‘알’은 빛을 의미하는 해(日)이며 ‘이’는 그 이(者), 저 이의 의미를 갖는 해를 의인화한 것이다. ‘랑’은 벼랑(峙), 낭떠러지를 의미하는 등성이를 나타낸다. 즉 ‘아리랑’은 밝아오는 빛등성이의 ‘해님언덕’을 뜻한다. 아리랑 고개는 ‘해님재 고개’로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넘고 넘던 고갯길로 유추할 수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은 민족의 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민족의 희로애락과 더불어 존재해 왔다. 한민족 고유의 정서와 문화를 계승하며 민족의 사랑을 받았던 노래다. 우리 민족이 향유할 수 있는 가요문화의 뿌리에 해당한다.

2. 아리랑 기원설

(1) 백제 기원 초 <정읍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후렴구 “어거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에서 지금의 아리랑과 그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으 다롱디리 → 아롱다롱 → 아리롱 → 아리랑”으로 변화됐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2) 현재 서울 성북구 미아동 아리랑 고개 이름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이곳에는 수백년간 죄수들의 처형장이 있었다. 사형수가 처형장을 향하여 오르며 불렀다는 이야기다.

미아리 아리랑고개는 1926년 춘사 나운규(1902~1937) 감독 주연의 무성영화 주제곡이다. 아리랑 고개에서 이별하는 장면을 보며 청중들은 단성사가 떠나갈 듯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전국 방방곡곡 이 영화가 상영되는 곳에선 관객들 통곡 소리가 들끓었다는 것이다.

(3) 평안도 자비령 고개의 속명인 아리랑고개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고려 때 몽고 침략으로 백성들이 피난을 떠나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며 고향을 돌아보고 서러움을 토해낸 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4) 대원군이 임진왜란 등으로 유실된 경복궁을 복원할 때 전국에서 강제 동원된 인부들 사이에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불러 유행가가 됐다는 설도 있다.

(5) 밀양지역 아리랑의 전설에서 유래되었다는 얘기도 있다.?밀양 사또의 ‘아랑’이라는 딸과 평민청년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아랑가>라 불렀으나 뒤에 ‘밀양아리랑’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6) 강원도 정선지방에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10살 꼬마신랑을 만나 달콤한 신혼생활보다는 신랑 시집살이에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신부가 있었다. 그녀가 목숨을 버리러 강가로 가던 중 물레방아가 무심히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다소 위안이 되어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노래를 불렀으니, 이 노래가 지금의 ‘정선아리랑’이다.

3. 아리랑 공연

아리랑은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우리 생활 속에?깊숙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라디오 드라마 <그 후의 아리랑>, 무용가 최승희의 <아리랑 리듬>공연이 있다. 방송 매체가 생기면서?음악이라는 ‘소리현상’을 채집하여 상품화하고 기록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세계 각국의 새로운 노래문화가 퍼지며 점차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다.

경성의 ‘싸롱 아리랑’, 신의주 ‘카페 아리랑’ 등이 문을 열고, ‘꾀꼬리 아가씨 아리랑 총각’과 남성중창 ‘아리랑 뽀이스’도 인기를 끌었다. 그 무렵은 ‘오빠는 풍각쟁이’의 작곡자인 김해송이 유명했다. 그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의 남편이다. 이른바 신민요라는 이름으로 한국인의?정서에 맞춰 민족성을 자극하는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있던 시절이다.

신민요 아리랑은 30년대 선우일선의 <그리운 아리랑>, 윤건영의 <강남아리랑>, 이애리수의 <신아리랑>, 1940년대 백난아의 <아리랑 낭낭> 등의 이름으로 크게 유행하게 됐다.

4. 아리랑의 세계화

1950년대 후반 <바우고개> 등 많은 애창곡을 남긴 작곡자 이흥렬(1909~1981)이 아리랑의 세계화를 처음 거론했다. 그는 “아리랑의 곡조는 간단하고 단순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 있으며 다른 민요보다도 유난히 외국에 소개할 만하다”고 했다.

아리랑은 해방 후 1945년 미 제29사단이 발행한 <Korea Graphic>에 소개됐고, 각종 위문 공연에선 단골 메뉴가 됐다.

미국의 재즈 음악가 오스카 패티포드는 아리랑을 편곡한 A-Dee-Dong Blues를 찰스 밍거스의 베이스 연주에 맞춰 음반으로 취입했다.

컨트리 음악의 대부인 피터 시거는 아리랑 라이브 음반에 벤조 연주를 했다. <Mona Lisa>를 부른 1950대와 1960년대 미국 최고의 스탠다드 팝 가수 냇킹 콜(1917~1965)은 1964년 내한 공연한 <아레이-라잉>을 라이브 앨범에 담아 세계음반시장에 알렸다.?1970년대 이후 재즈와 팝을 아우르며 아버지의 명성을 이은 걸출한 여성음악인 나탈리 콜은 그의 딸이다.

프랑스 출신 뮤지션으로 최초로 빌보드 챠트 정상에 오른 폴 모리아 악단이 1965년 내한 공연 후 정규음반에 아리랑을 실으면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들은 <Love is Blue>로 1968년 2월10일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5주 동안 정상을 차지한 1960~1970년대 세계적인 연주음악 그룹이었다.

이들은 그 후로도 몇 차례 내한공연을 하며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아리랑>을 연주했다. 무엇보다도 ‘아리랑 세계화’의 1등 공신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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