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위안부 문제’ 해결 24주년 수요집회 참관기
[아시아엔=글·사진 이상기 기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 24주년인 6일 낮, 서울 일본대사관 앞. 하늘은 맑고 바람은 차디찼다. 이날 행사 시작 20분 전 <아시아엔>에 연수 와 있는 라훌 아이자즈(파키스탄), 라드와 아시라프(이집트) 기자와 현장을 찾았다. 라훌과 라드와 두 외국기자는 이 집회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했다.
최정아 기자더러 이들 두 외국기자의 취재를 지휘하라고 맡기고 나는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1988년 여름 수습기자 시절 만난 차수련 당시 한양대병원 노조위원장. 차씨는 대학교 4학년 딸을 데려왔다. 차씨는 이달 말 튀빙겐대로 1년간 연수 떠나는 남편과 1년간 독일로 연수를 떠난다고 했다. 그때 이부영 전 국회의원이 나타났다. 11시50분이었다. 차씨가 반색하며 이부영 전 의원을 맞는다. “무대 앞쪽으로 가셔야지요, 의원님?” 하는 차씨에게 이 의원은 “아냐, 난 여기가 좋아” 한다.
대회 시작 10분 정도 남았는데 참석자들은 얼추 200명은 넘는 듯했다. 여기저기 경찰 무전기 소리도 커지고, 의경들 발걸음도 재졌다. <경인방송> 갈태웅 기자가 보인다. <경인일보>에서 시작해 <MBN>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경인방송에서 일하는 갈 기자는 한때 민완기자로 날렸다. 우리 옆으로 서양사람이 지나친다. 사진기, 수첩도 없는 걸로 봐선 기자는 아니다. “어디서 왔느냐? 기자냐?”고 영어로 물으며 명함을 건네자 그도 명함을 꺼내준다. 미국 캘리포니아 무어파크컬리지 정치학 교수 잭 밀러라고 쓰여있다. 교환교수로 왔다고 2주 뒤 한국을 떠난다는 잭 밀러는 “집회에 관심이 있어 나와봤다”고 했다.
군중 속에서 박석운씨가 보였다. 그와는 80년대 후반 노동운동 현장취재 때 마주치곤 했다. 지금은 사라진 ‘구리 원진레이온’ 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 가운데 하나로 내게 기억되고 있다. 2차선을 사이에 두고 소녀상과 마주하고 있는 일본대사관 건물을 아래 위로 훑어보며 무대쪽으로 가다가 <한겨레> 김봉규 사진기자를 만났다. 머리도 희고 수염을 길러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그는 시위현장, 풍경, 기자회견 등 사진거리가 되면 달려가는 진짜 사진기자다. 취재기자는 자신은 현장을 놓쳤더라도 현장에 있던 사람을 통해 재구성이 가능하지만, 사진기자는 현장을 놓치면 그걸로 ‘끝’이다!
무대 뒤 연합뉴스쪽으로 가 1m 채 안 되는 담장에 올라 스마트폰으로 무대쪽을 몇장 찍다가 휠체어 전동차에 앉아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명함을 건네니 그도 내게 자신의 것을 준다. ‘네트워크호산나’ ‘파트너 이동훈’이라고 적혀있다. “몸이 불편하신데, 수요집회에 나오셨나요?” “2005년부터 나왔습니다. 회사 문닫고 전도사로 일하다 그것도 접었지요.” “원래 불편하셨나요?” “솔로몬병이라고 그게 걸려서 어려서부터 그런데, 한국은 장애인들한테 참 잘 해주는 나라입니다.” 그는 금천구 구로동에서 왔다고 했다. 얼굴표정이 무척 밝은 그의 말은 내 가슴에 공감을 불러온다. “정부가 솔직하게 국민들을 대하면 내가 이런 데 올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을 거다. 왜 국민들을 믿지 못하는지 참 어리석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씨는 자신의 사진을 보도해도 좋다며 선글라스를 벗고 포즈를 취해준다.
이때 경찰들과 사진기자의 실랑이 소리가 들려온다. 높이 3m 정도 되는 시설물 위에서 촬영하는 사진기자를 발견한 경찰이 달려온 것이다. <시파프레스> 한국특파원 이영호 사진기자도 그 사진기자를 응원하러 다가왔다. 그 용감한 사진기자는 <포커스뉴스> 김흥구 차장이었다. 그에게 한마디 했다. “오랜 만에 기분 좋은 사진기자 봤다. 높은데 위험 무릅쓰고 올라가 롱컷에 담으려는 기자, 진짜 사진기자답네요.”
정신대대책협의회 회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10여분 계속된 후 추미애, 심상정 의원이 무대 앞에 나와 열변을 토한다. 옛날 웅변대회가 문득 떠올랐다. 아마 다른 장소였다면 박수가 끊임없이 이어졌을 것이다.
김학순 할머니 석상을 포옹하는 퍼포먼스가 끝나고 어느덧 오후 2시 다 되어 행사는 마무리됐다. ‘소녀상’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 사진을 찍거나 소녀상을 쓰다듬는 이들도 더러 보인다. 하지만 어두운 표정은 안 보인다. 아마도 ‘오늘 이 자리, 이 소녀를 내가 지켰다’는 자부심 때문이리라.
아침에 읽은 <조선일보> 선우정 논설위원의 칼럼이 떠올랐다. 지금 이 글을 쓰며 그의 칼럼을 다시 읽어본다.
(상략) 이 정부는 역사를 중시하는 듯하지만 실은 역사에 대한 사유(思惟)가 없는 듯하다. 위안부 해결의 다른 한 축인 배상은 사죄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어렵다고 포기할 일이 아니다. 위안부 배상 요구를 할머니들의 외고집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하략)
다만 기억했으면 한다. 위안부 문제 타결 당일 88세 피해자 할머니는 말했다. “정부가 애쓰고 법이라는 게 있으니까 정부가 하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 이 목소리는 그 후 타결 내용에 대한 거센 반발 속에 묻혔다. 정부에 순응하란 얘기가 아니다. 그들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할머니 이야기대로 ‘정부가 애썼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증오를 축적했다. 상대를 이해하려 하는 대신 일본 정치가의 말 한마디, 삼류(三流) 언론의 글 한 줄까지 들춰내 화내고 흥분했다. 분노를 버팀목으로 25년을 지내오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를 이해해주던 응원단은 곁을 떠나고 서로 삿대질하는 우리만 남았다. 위로와 격려는 사라지고 분노만 역류하고 있다. 우리의 기나긴 25년 분투를 이렇게 어리석게 마무리할 수는 없다.
아침에 읽은 그의 칼럼을 다시 읽으니 가슴은 묵직하고 머리엔 뭔가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어느 편에 속하지 않고 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때론 무모하기까지 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 나는 내 할 일을 했다며 자위한다. 가야 할 곳에 가서, 귀한 사람을 만나고 소중한 사건현장을 지켰다고. 그리고 내가 20년 이상 몸담았던 한겨레와 대척점에 있다고들 이야기하는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이 쓴 글을 차용하면서 이 글을 소신있게 마무리하니 말이다.
오는 13일 수요일 낮 12시 나는 다시 소녀상 앞 수요집회에서 나갈 것이다. 또다른 만남을 갖고 싶고, 소녀상을 어루만지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