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구순 두 ‘대가’에게 아낌없는 갈채를…황경춘 전 AP서울지사장과 박상설 ‘아시아엔’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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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이상기 기자] 대한민국 최고 현역기자는 누구일까? 필자는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박상설(88) 전문기자를 꼽아왔다. 박 전문기자는 지금도 매월 2~3차례 <아시아엔>과 <매거진N>에 정기적으로 칼럼이나 인터뷰 기사 등을 쓰고 있다. 그는 본래 기자 출신이 아니다. 공학도인 박상설 전문기자는 80대 초반까지 50년 이상 건축감리사로 지내며 자연주의 삶을 이어왔다. 30년 전 뇌출혈로 사망의 문턱까지 갔다가 걷기와 명상을 통해 완쾌한 후 <동아일보>에 투병기를 쓰며 글쓰기에 몰입했다. 이후 2011년 11월 <아시아엔> 창간 직후부터 ‘박상설의 자연 속으로’를 연재하며 기자 겸 칼럼니스트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2014년 <아시아엔> 연재 글을 바탕으로 단행본 <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를 낸 이후 전국의 지자체와 거창고교 등 학교 등에서 ‘자연과 인생’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박 전문기자는 평생을 통해 해외출장때도 호텔 대신 텐트에서 숙박을 할 정도로 신념을 견지하는 분이다.

또 한분이 계시다. 김승웅 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이 방장으로 운영하는 ‘마르코글방’에 주로 일본에 관한 칼럼을 쓰는 황경춘(94) 전 AP서울특파원 겸 지국장(TIME지 서울지국기자, 외신기자협회 회장 역임)이다. 그분은 요즘도 2~3일에 한번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일본의 주요언론에 난 사설이나 칼럼을 마르코글방에 소개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황경춘 전 지사장은 50년 외신기자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정보력과 통찰력을 겸비한 글로 글방 가족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황 전 지사장 역시 현역기자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2012년 설날 다음날 인도와 일본에서 유학 와 아시아엔에서 인턴을 하고 있던 양성명(중국), 라훌 아난드(인도)와 세배를 갔을 때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기록은 기억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 이분들이야말로 산 역사요, 역사의 산 증인이다.

황경춘 전 AP지사장은 지난 12월29일 마르코글방 송년회에서 이형균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부터 하모니카(이형균 전 국장은 “김종섭 삼익악기 회장한테 선물받은 것”이라며 전달했다)를 받고 즉석에서 연주하던 모습과 음율이 무척 아름답고 감미로웠다. 황경춘 선생은 이틀 뒤 ‘마르코글방’에 다음과 같은 글을 띄웠다. <아시아엔> 독자들도 병신년 내내 아름다운 감미로운 삶을 이어가기 바라며 일부 옮긴다.

마르코글방 송년회장에서 황경춘 전 AP서울특파원. 사진 오른쪽 두번째. 사진 왼쪽은 신우재 전 청와대 비서관, 구대열 전 이화여대 교수. 오른쪽은 이형균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마르코글방 송년회장에서 황경춘 전 AP서울특파원. 사진 오른쪽 두번째. 사진 왼쪽은 신우재 전 청와대 비서관, 구대열 전 이화여대 교수. 오른쪽은 이형균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마르코’글방 송년회를 끝으로 모든 모임이나 행사를 다 미치고 을미(乙未)년을 보냅니다. 네 시간에 걸친 참으로 즐거운, 모두가 동심으로 돌아간 한 때였습니다.

매년 김홍철 선생님과 이중 총장님(<아시아엔> 칼럼니스트-편집자)과 동석하던, 구석 ‘늙은이’ 자리에 금년에는 김종욱 회장님과 김지혜 여사를 비롯한 글방의 ‘세 여걸(女傑)’과 자리를 같이했습니다.(중략)

이런 모임에 항상 있는 추첨행사에 한 번도 큰 상을 뽑지 못하여, 집에서는 추첨 운(運)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현역 시절, 외신기자클럽의 연말 모임에는 각 기업체로부터 많은 경품이 기증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번도 해외 비행기 표, TV세트, 냉장고 등의 큰 상을 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금년 송년회에는 행여나 하고 추첨 결과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금년 모임에서는 전연 예기치 않았던 일이 저를 즐겁게 하였습니다.

회원들의 여흥이 계속되고 있는 시간에 이형균 회장이 갑자기 저를 불러냈습니다. 이 회장이 건네주는 포장을 열자마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게 준비된 것은 하모니카였습니다. 제 호주머니 속에는 이미 하모니카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글방 송년회에서 하모니카를 연주한 적이 한 번 있습니다. 전문 연주가도 아닌 제가 감히 또 한 번 하모니카 연주를 한다는 것은 별로 칭찬 받을 일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노래 부르는 것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그 대신 하모니카 부는 것은 긴장이 좀 덜 드는 듯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전에 제가 사용하던 하모니카는 6.25 때, 구입한 일제 하모니카로 케이스도 낡아빠진 ‘역사적 유물’ 비슷한 악기였습니다.

이를 보다 못해 딸아이 하나가 지난 추석 때 선물로 국산 하모니카 하나를 사주었습니다. 이것을 한번 시험해보자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를 보던 ‘마사모’ 신우재 회장이 하모니카를 가져왔느냐고 손짓으로 묻기에 나중에 하겠다고 말한 얼마 뒤 이 같은 놀랄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중략)

너무 기쁜 나머지 기꺼이 즉석에서 옛 노래 몇 곡을 연주했습니다.(중략) 이형균 회장이 주신 하모니카 세트는 23혈(穴)의 보통 하모니카 외에 재즈 가수들이 가끔 쓰는 10혈의 짧은 반주용 하모니카도 들어 있었습니다. 이로써 저는 갑자기 네 자루의 하모니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장갑 사라고 주신 돈으로 하모니카와의 인연을 맺어, 일제강점기 사춘기를 쓸쓸한 하숙방에서 보내는 외로움을 달래는 데 큰 도움이 된 하모니카입니다.

그때 배웠던 유행가를 지금까지 잊지 않는 것도 하모니카 덕택입니다. 저는 정식으로 악보를 읽지는 못하지만, 하모니카는 멜로디만 알면 불을 수 있는 손쉬운 악기입니다.(중략)

이번 송년회에서는 30여 년 만에 만난 옛 얼굴도 있었습니다. 홍순길 항공대 총장의 소개로 입회한 박영길 전 동국대 법대학장이 그 분입니다. 이런 옛 친구를 알아보면서도 나이 탓으로 오는 잊음은 어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과감하게 새로운 삶을 개척한, 평소에 제가 존경하는 ‘허브나라’ 이호순 회장과, 40여 년의 지기인 ‘트래블프레스’의 소재필 회장의 성함을 틀리게 발음하고, 경로사상이 철저하다고 평소에 존경하던 소재강 회장 성함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등 실책을 범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노추(老醜)를 알면서도 기를 쓰며 모임에 참석하는 늙은이를 어느 정도까지 사회가 허용해 주는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 받는 노경(老境)일까 하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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