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유네스코등재···한일관계 해법 또 무엇?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국과 일본의 전문가들이 300점의 조선통신사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 유산에 공동으로 등재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정유재란 종식 후 1607년에서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400명이 넘는 조선통신사 일행이 파견되었다. 1607년이라고 하면 조선은 선조의 마지막 재위 시절이며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열리던 시기이다. 막부는 영주들에 명하여 조선통신사를 접대하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는데 오늘날로 환산하면 8000억원이 들었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당시 일본의 번영은 조선이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통신사는 오사카를 보고 “한양의 1천배나 번성하다”고 하였다. 도쿠가와 당시 일본의 국력은 조선에 비해 몇 배 위였다. 국력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영주들의 성(城)이다. 히메지, 오사카성 등은 오늘날에도 놀라울 정도다.
당시 조선이 일본에 대해 우월했던 것은 문화였다. 특히 통신사 일행의 시 서 화(詩 書 畵)는 일본인들이 서로 간직하려 하였다. 문치주의 국가인 조선에서도 선발된 통신사 일행의 실력은 일본이 경제력으로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은 벌써 세계와 호흡하고 있었다. 일본 최고의 지식인이 조선 서장관과 대담하며 자신은 대서양, 스페인, 네덜란드를 안다고 하면서 조선에 만국지도가 없으면 구해줄 수 있다고 하여 말문이 막히게 하였다. 조선 통신사는 국가기밀인 <징비록>과 <간양록>이 책방에 나와 있고 일본인과 대담한 시문집이 바로 출판돼 나와 놀랐다고 한다. 메이지유신 전에도 일본의 국가 경영은 우리보다 한참 앞섰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조선통신사 기록은 한국이 일본에 콤플렉스를 가지지 않아도 되는 드문 유산이다. 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남기고 세계에 알린다는 것은 양국이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공동의 자산이다.
일본이 지난 세기 한국에 가한 역사는 천년을 두고 변하지 않는다. 허나 한국과 일본이 일의대수(一衣帶水)라는 숙명은 만년을 두고 변치 않을 것이다. 중국은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에 중일전쟁 중 일본군의 천인공노할 난징학살을 올렸다. 일본으로서는 낭패다. 이런 역사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일본군 성노예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남기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제는 이를 넘어서는 선양을 이루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을 해저터널로 연결하는 착상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이 프로젝트는 양국의 국력과 기술력으로 보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천년의 앙숙인 영국과 프랑스가 영불 해저터널로 연결된 것이 1995년이다. 이 터널을 통하여 영국과 프랑스만이 아니라 온 EU가 연결된다. 이를 추진하려면 양쪽에서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할 것이며 이를 얻어내기 위한 지도층의 노력이 중요하다.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도 이런 점에서 중요하다. 이런 쉽지 않은 과제를 풀기 위해서는 “십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많은 일본인들은 한국을 잘 모른다. 한국인도 일본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적다. 양국 모두 나름의 의도를 가진 정치인들이 만들고 이에 보조를 맞추는 미디어에서 만들어내는 인상(印象)에 의한 선입견에 붙잡혀 있는 수가 많다.
쇄국은 국가정책으로서 망조다. 국민의 정신이 열려 있지 않는 것 역시 쇄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