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교과서 국정화’와 김남식·이정식·한홍구의 ‘한국현대사 자료총서’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1986년 나온 <한국현대사 자료총서>는 1945~1948년 해방공간에서 구할 수 있는 자료를 망라하고 있어 현대사 연구는 이 총서를 떠나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를 만드는 엄청난 작업은 김남식, 이정식, 한홍구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남식은 1956년 남파간첩으로 검거되었는데 전향하여 중앙정보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였다. 공산주의 이론에 관한 한 그를 넘어 설 자가 별로 없었는데 이는 그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당원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간첩으로 남파된 것도 김일성이 박헌영의 수하를 소진시키려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북한에 대하여서는 정통하면서도 김일성에 대하여는 노골적 비판을 하지 않았다.

그를 오래 알고 있던 분은 “김남식은 아까(빨갱이)야”라고 한마디로 단언한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그는 통일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는데, 그가 죽었을 때 조문록에 이름을 올린 가운데는 학계는 물론 사회 각계의 명사가 수두룩하다.

이정식은 버클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펜실베니아대학에서 교수를 한 저명한 정치학자다. 그가 스칼라피노 교수와 함께 저술한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명저다. 이정식은 김준엽, 서대숙 등과 함께 한국 공산주의운동 연구의 1세대인데, 공산주의를 연구하면서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회의는 없는 순정한 학자였다. 그는 1948~49년의 김규식 등의 좌우합작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이 부분에서 김남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홍구는 일조각 사장 한만년의 아들이며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의 외손자로 학문적으로는 최고의 집안에 태어났다. 그는 서울대 인문사회계열?국사학과에 들어가 현대사 연구에 몰두하던 중 김남식을 만나 그를 도와 <한국현대사 자료총서>를 준비하게 된다. 1945년에서 1948년에 이르는 동안의 한국정치와 사회에 관한 자료의 차원에서 국내에서 이 총서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1990년대에 공산권이 붕괴되며 쏟아져 나온 자료는 포함하지 못하고 있다는 치명적 한계를 지닌다. 김일성을 ‘민족적 영웅 운운’하는 것은 어린 소치로 발언한 것일 텐데 지금은 주워 담지도 못하여 곤혹스러울 것이고 내친 김에 그 길로 나서고 있을 것이다.

문인으로서 유진오도 한때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 동맹)에 기울던 때가 있다. 당시는 “20대에 맑시스트가 아니면 바보요, 30대에도 유물론자라면 바보다”는 말이 풍미하던 때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의 젊은이들이 김일성을 추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김일성은 맑스를 제대로 공부한 자가 아니다. 그러니 그렇게 쉽게 ’제멋대로의 주체사상’을 들고 나온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이럴게 천격에 빠지는 것은 위험하다고 하기보다도 슬프다.

5공의 원초적 죄악은 많은 유위한 젊은이들을 이러한 절망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흐름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을 거치며 심화되어 갔다. 이명박도 흐지부지 하였는데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통성 세우기’의 짐을 지고 나섰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이런 것을 정확히 알고 정교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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