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교과서 ‘국정이냐 검인정이냐’보다 중요한 것들···고조선·고구려사, 김석형 등 북한학자 연구도 과감히 수용해야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국사 교과서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정부에 의해 막을 올렸다. 문제는 “국정이냐 검인정이냐”가 아니다. 史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역사교육은 하나로 정립되어야 한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위)가 중심이 된다고 하는데 걱정이다. 국편위에서 발간한 50권의 <한국사>는 학자들의 저술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으로 편찬이라고 하기 어렵다. 조선에서 실록을 편찬하던 것을 상기하자. 歷史로 기록되어야 할 시대의 하한선을 우선 정하자. 그 이상은 時事다. 해방 후 남북분단이 1945년 9월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이미 결정됐다는 것이 1993년에야 나왔다. ‘역사’를 넘어서는 부분은 1960년대 유진오의 <공민>과 같이 다루면 된다. 이참에 논란이 많은 근현대사를 넘어서 우리 역사의 몇 대목은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삼국통일에 있어 김인문, 문무대왕의 역할과 업적이다. 김유신과 김춘추에 비하면 그에 관한 부분은 계림도독부를 설치해 신라까지도 병탄하려던 당을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는 정도로 소략하다. 그러나 실제로 이 부분은 훨씬 장대하다. 신라가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3만명의 군사로 당의 20만 대군을 물리친 것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맞먹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당시 당은 오늘의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이었다. 매소성 전투의 패전을 계기로 당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고 평화를 맺었던 것이다.
이 부분이 소략하게 기술된 원인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한 묘청을 제압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그렇게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삼국사기의 제한과 성격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성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고대사 부분이 제한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다. 환단고기 등 재야사학자 등은 아니더라도 신채호, 박은식 등의 민족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다시금 고천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보다 고조선, 고구려, 고려 등을 깊이 연구하였을 북한의 박시형, 김석형의 연구도 참조하여야 한다. 1971년에 비로소 열린 무령왕릉이 백제사를 훨씬 풍부하게 해주었던 것이 생생하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비를 위해서도 이 부분은 더욱 충실해져야 한다.
다음으로 임진왜란의 국제정치적 성격이다. 임진왜란은 조선이 일본을 물리친 것을 넘어서 16세기의 동아시아 정세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453년 동로마제국이 오스만 터키에 멸망한 정도의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 조선이 왜를 구축한 힘의 주력은 이순신의 수군이었다는 것이 훨씬 강조되어 기술되어야 한다.
뼈아프지만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조선의 국모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1895년 을미사변의 성격이다. 이것은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일본에서 건너온 문세광에 의해 저격된 사변과는 다르다. 이때 조선은 사실상 망한 것이다. 따라서 일제 강점은 35년이 아니라 50년이라고 해야 하며, 일제강점 하 독립운동사를 다루는 현대사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1937~1938년 중일전쟁 중 일본군이 자행한 난징 대학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오르게 됐다. 이것은 나치 독일의 유태인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세계인을 전율시키고 있는 것과 같다.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한사코 외면하려는 아베로서는 치명적일 것이다.
현대사는 현재의 한국인이 살아온 역사다. 엄격하게 사실(事實) 자체가 말하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