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국사교과서 집필 거부선언 교수들께 묻습니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1959년 나온 진단학회의 <한국사 7권>은 그때까지 국사학계가 성취한 기념비적인 소산이다. 진단학회는 한글학회와 같이 학회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6.25전쟁이 겨우 끝나고 자유당 부패가 극성해지던 1950년대 중반에도 학자들의 노작이 이렇게 소산되었음은 놀랍다. 진단학회의 <한국사>는 1967년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이라는 통사로 집약되었다.
진단학회 <한국사>는 1910년 경술국치를 기술의 하한으로 삼고 있다. 놀랍게도 1910-1945의 일제 강점이나 1950-1953의 6.25전쟁은 다루지 않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를 참조한다면 5.16은 역사에서 다룰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精髓를 가르쳐서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진오의 <공민> 교과서에서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법의 지배, 대의민주정치, 삼권분립, 정당책임정치” 등을 들고 있다. 이것을 학생들에게 정확히 가르치고 각종의 정치현상에 대한 판단은 각자가 알아서 하게 된다. 이것이 자유민주사회의 이념교육의 방법이다. 4.19혁명은 여기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배운 학생들이 일어난 것이다.
국어학은 주시경부터 최현배, 이희승, 이숭녕, 허웅으로 내려가며 정립되었다. 허웅과 동년배인 북한의 류렬이 200자 원고지 2500매에 달하는 <향가연구>를 한국에서 출간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독보적이던 양주동의 <고가연구>를 넘어서는 연구가 나온 것인데, 북한의 연구 소작이 한국에서 출간된 것도 놀랍고, 고무적이다. 해방 후 북한정권 성립에 참여하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까지 지낸 김두봉을 이어 국어학 연구가 연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에서 만들고자 하는 ‘올바른 국사교과서’를 만드는 데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는 몇몇 대학 국사학과 교수들은 그 명단이 기록에 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국사교과서가 어떻게 기록되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이들 가운데 진단학회의 <한국사>나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송호정의 <부여사>에 버금가는 학문적 노작을 낸 교수들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연구하기에도 바쁜 학자들이 무슨 딴 데 한눈을 판단 말인가?
올해도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자 중국, 일본에서 연이어 수상자가 나오는데 한국에서는 나오지 못함을 개탄하는 소리가 많다. 문제는 이렇게 나가다가는 한국은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 몇십년이 지나도 노벨상을 받을 만큼의 수준에 오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에베레스트산이 높은 것은 히말라야산맥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성취한 수준이 번연하다면 거기서 나올 것도 不問可知 아닌가? 토인비는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역사의 연구>는 E. H. 카(Carr)의 방대하고 정치(精緻)한 <러시아혁명사>와 달라 사학계에서는 대단한 노작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우리 학자들은 카의 대작을 보고 분연히 자극을 받아야 한다.
진단학회의 <한국사>는 국한문 혼용으로 저술되어 있어 196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는 이제 해독하기도 힘이 들어 읽고자 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한글전용을 주장했던 최현배 등이 이 현상을 보면 얼마나 놀라울까?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국역은 고전번역원에서 계속하더라도 <한국사>의 국역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학자들은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