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집착 벗으니 시련이 한순간 풀리더라”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우주의 진리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우주의 진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창조도 없고 멸망도 없는 것이다. 그걸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일체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만법이 없어지지도 않으니,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는도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화엄경>(華嚴經)에 있는 말씀인데 불법(佛法)의 골수다. 결국 팔만대장경이 그렇게 많고 많지만 한마디로 축소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과 인과보응(因果報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 만물 전체가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난 자는 반드시 없어진다는 말이다. 생자는 필멸인데 어째서 모든 것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하셨을까? 세상에서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든지 났다고 하면 다 죽는 것이다. 그런데 왜 부처님은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이라고 하셨을까?

이것을 바로 알려면 도를 확연히 깨쳐야 한다. 일체가 나지도 않고 일체가 멸하지도 않는 이 도리를 바로 아는 것이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우주의 진리를 깨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다. 그래서 불생불멸인 이 우주를 불법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한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이다.

‘법(法)’이란 불생불멸의 진리를 말한다. ’천삼라 지만상(天森羅 地萬象)‘ 전체가 다 불생불멸의 위치에 있어서 세상의 모습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생멸(生滅)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고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우주 전체가 불멸이다. 이것이 만법의 참모습으로 불법에서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불기 2559년 부처님오신날을 하루 앞둔 24일 오전 경기 화성 용주사에서 한 불자가 간절함이 묻은 기도를 하고 있다. 2015.05.24
?한 불자가 기도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 어느 때, 한 제자가 “우주의 본가(本家)는 어떠한 곳이오니까?” 하고 여쭈어 왔다. 소태산 부처님께서는 “그대가 지금 알지 못하므로 내 이제 그 형상을 가정하여 보이리라” 하시며 땅에 일원상(一圓相)을 그려 보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일원상이 곧 우주의 본가이니 이 가운데 무궁한 묘리(妙理)와 무궁한 보물(寶物)과 무궁한 조화(造化)가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어 있느니라.”

이어지는 문답이다. “어찌하면 그 집에 찾아들어 그 집의 주인이 되겠나이까?” “삼대력(三大力)의 열쇠를 얻어야 들어 갈 것이요, 그 열쇠는 신(信) 분(忿) 의(疑) 성(誠)으로써 조성하느니라.”

우주를 내 집으로 삼을 수 있는 열쇠! 그 삼대력은 정신수양(精神修養)·사리연구(事理硏究)·작업취사(作業取捨)즉, 삼학(三學)을 닦아 얻어진 힘을 말한다. 이 삼대력을 얻는 방법이 바로 ‘신성과 분발과 의심과 정성’으로 조성한다는 말이다. 일원상은 우주의 모습을 사진 찍어 보니까 한 큰 원상(圓相)으로 나타났다는 말로 진리를 나타내는 표상(表象)이다.

어느 절의 주지스님께서 마당 한 가운데에 큰 원상을 그려놓고는 동자승을 불러서 문제를 냈다. “내가 마을을 다녀왔을 때, 네가 이 원상 안에 있으면 오늘 하루 종일 굶을 것이다. 하지만 원상 밖에 있으면 이 절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는 마을에 나갔다.

동자승은 난감했다. 원상 안에 있자니 가뜩이나 배가 고픈데 오늘 하루 종일 굶어야 할 것이고, 원상 밖에 있으면 절에서 내쫓김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어찌하면 좋을까? 그냥 하루 종일 굶는 길을 선택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절을 나가야 할까?

한 시간 뒤에 드디어 주지스님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 동자승은 하루 종일 굶을 필요도 없었고, 절에서 내쫓기지도 않았다. 어떤 선택을 했던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원상의 선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분도 있다. 물론 선 위에 서 있었다면 원상 안도, 원상 밖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답이 아니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또 무상(無常)함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문제는 풀린다. 동자승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당 한구석에 놓인 빗자루를 가지고 와서는 스님이 그려 놓은 원상을 쓱쓱 쓸어서 지워버렸다. 원상이 없어졌으니 원상 안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원상 바깥에 머문 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 원상을 없애면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이러한 원상을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 물질이라는 원상, 명예라는 원상, 욕심이라는 원상, 미움이라는 원상, 그밖에 여러 가지 원으로 인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이 원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그 원상을 지우는 수밖에 없다.

<아시아엔> 독자 여러분이 동자승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우리에게 고통이 오는 것은 삼독(三毒) 즉,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오욕(五慾) 즉, 재색명리 안일(財色名利 安逸) 때문이다. 이 삼독과 오욕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고해(苦海)에서 살 수밖에 없다. 집착하면 안 된다. 일원상도 진리의 표상일 뿐 진리 자체는 아니다.

동자승처럼 땅에 그려진 원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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