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삼복 무더위 이기는 ‘3무 수행’···무심·무념·무상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명예회장] 세상을 무심(無心)으로 살기가 참 어렵다. 순간순간 따라오는 경계(境界)를 무심으로 대할 수 있다면 세상사 괴로울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런 경지의 사람을 보고 우리는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 한다. 무심도인은 도(道)를 깊이 닦아 세속의 온갖 물욕과 번뇌에서 벗어난 사람을 말한다. 또 천진(天眞)과 본연(本然)에 합한 수행인을 말하기도 한다.

사물에 관심이 없는 것이 무심이 아니다. 무심이란 능히 모자람이 없고, 소유함을 초월한 여여(如如)한 자리를 말한다. 무심은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심산유곡과 같다. 그래서 무심도인은 걸림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는, 자유로움을 말한다. 그야말로 온갖 경계에 제압당하지 않는, 쇠같고 돌과 같은 경지다.

수행자의 무심경계는 성불에 이르는 사다리나 다름이 없다. 무심은 남의 허물을 용납하며 수용하는 자리에 오른 경지다. 무심은 높은 안목을 갖춘 경지에 오른 사람의 자리이고, 백 천 만억 경계를 돌파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를 무위진인(無爲眞人) 또는 무심도인이라 한다.

우리가 사물을 무심으로 보고, 무심으로 들어야만 진리의 말없는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 무심하면 자연히 지견(知見)이 열린다. 그러면 자기에 속지 않는다. 지견에 안주 하지 않고 나아가는 길, 그 길이 ‘무쟁삼매(無諍三昧)’로 가는 길이다.

무심도인의 경지에 오른 도인의 모습은 어느 정도일까? 옛날 금강산에 율봉선사라는 유명한 스님이 계셨다. 그 스님이 볼일이 있어 서울로 오게 되어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어느 양반집 아이들이 큰 길가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을 봤다.

율봉선사는 멀리서부터 그들에게 허리를 굽히고 슬슬 기어가다시피 하며 “소승 문안드립니다” 하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당시만 해도 승려를 천시하는 때였다. 때마침 심술궂은 한 양반집 소년이 무슨 인사가 그 모양이냐며 발길로 스님을 찼다.

스님은 미나리 강으로 나뒹굴어 떨어졌고, 소년의 신발도 발길질하는 바람에 미나리 강에 빠졌다. 스님은 손자 같은 그들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마음은 추호도 없이 발길질한 소년의 가죽신을 얼른 건져서 자기 옷으로 물기를 닦아 그 아이 앞으로 가서 말했다.

“이 노승이야 다 늙어 죽게 된 목숨이니 아무리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도련님 발이나 다치지 아니하셨습니까?” 하며 신을 신겨 주었다. 그 한 말씀에 소년이 감화가 되었다. 이 소년이 당대 세도가인 김대감이란 사람의 아들로 그는 그 뒤에 스님을 찾아 사과하고 각별한 대접으로 존중하였으며, 금강산의 절일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다음은 학산스님 이야기다. 스님을 신봉하는 신자가 염불양식이나 하라고 10여 두락의 논을 사드렸다. 그 뒤에 소작을 주어 도지를 가져오면 가져다주는 대로 받을 뿐 많고 적은 것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소작인은 그 스님이 무욕 담박한 도인스님으로 알기 때문에 도지를 가져다주고 싶은 대로 가져다 드렸다. 마음이 내키면 얼마를 더 가지고 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3분의 1도 안 갖고 갔다. 그 꼬락서니를 스님의 상좌들이 보니까 해도 너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타작하는 마당에서 반씩 갈라오기로 했다.

그러나 소작인들이 벼 7, 8말을 담고도 한 섬이라고 속이기가 일쑤였다. 어느 해는 상좌들이 큰스님이 보시는데 말로 되어 담게 하면 나을까 싶어 억지로 스님을 모시고 갔다. 벼 타작을 다하고 섬 속에 말로 되어 담는데 보통 다섯 말 정도를 빼고 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스님은 주장자를 짚고 서서 먼 산 만 바라보고 선정(禪定)에 들어있다.

상좌들이 이 꼴을 볼 수가 없어서 “스님 저 소작인들이 말을 건너뛰어 불러서 한 섬이란 게 여덟 말도 담지 않는데 스님은 어찌 현장에 오셔서도 모른 체 하십니까?” 하며 원망을 했다. 그러나 스님은 “그놈이 먹으나 네놈이 먹으나 마찬가지 아니냐?”며 껄껄 웃으셨다.

무심도인 해탈도인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보면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말이 나온다. 일체가 텅 비었다는 말이다. 이 말이 바로 마음 가운데에 집착이 없는 해탈의 경지를 가리킨다. 텅 비었는데 무엇에 집착할까?

마치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가는 구름과 같이 머물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를 내던져서 어디에나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스런 생활을 하는 사람이 무심도인이다. 우리가 무심도인이 되면 무리가 없어서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울 뿐이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고단하면 잠을 잘 뿐이다.

인연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가는 사람 붙들지 않고, 오는 인연 막지 않는다. 작다 크다 좋다 나쁘다 싫다 좋다는 분별을 여읜지 오래다.

수도인이 구하는 바는 마음을 알아서 마음의 자유를 얻자는 것이고, 생사의 원리를 알아서 생사를 초월하자는 것이며, 죄 복의 이치를 알아서 죄와 복을 뜻대로 하자는 것이다. 이 경지에 오른 무심도인은 마음에 거짓이 없는지라 모든 행동이 참으로 나타나고, 마음에 상극(相剋)이 없어 모든 일이 덕(德)으로 나타난다. 무심도인은 언제나 마음이 바라서 삿됨이 없고 안온(安穩)하여 괴로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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