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을미년 ‘관상’보다 ‘심상’에 주목하세요

관상법(觀相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상(心相)의 판단이라고 한다. 이 심상은 무엇인가? 심상은 ‘마음을 쓰는 태도’를 말한다. 관상학의 원조 마의선생(麻衣先生)은 “사람의 운명을 판단하면서 먼저 그 사람의 형상과 모습을 보기 전에 그 사람의 내면에 감추어진 마을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 이유는 “만상(萬相)이 불여심상(不如心相)”이기 때문이다. 1만 가지의 상이 제아무리 좋아도 그 사람이 품고 있는 마음의 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마음이 곧 육체를 운전하는 주인이기 때문이다.

석가도 <화엄경>에서 “일체가 유심조(一切有心造)”라고 했다. 인간의 마음이 모든 업(業)을 짓고 선악을 만들어 가는 주인이기 때문에 그 마음의 행위에 대해 가장 많이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형상 이전에 마음이 먼저 생겼으며 따라서 그 마음은 형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마음의 행위에 따라 미추(美醜)가 하나의 형상이 되어 외적인 상(相)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는 것이다.

무릇 인간에게 밖으로 드러나는 고결한 인품과 천박한 인품 역시 모두 마음의 소산(所産)이다. 그러니까 그 마음을 잘 닦아서 심상을 좋게 쓰게 되면 그 행위가 음덕이 되어 자연히 몸과 얼굴에 스미어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 사람의 운명 역시 점차 행운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란 무형이므로 안에 숨어서 밖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형상만이 유형이므로 겉으로 나타날 뿐이다. 분명히 사람의 형상은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형상은 무형의 심경(心鏡)에 의해서 비춰지는 겉모습에 불과하다. 반드시 유형은 무형에 의해서 수시로 변화하는 상(相)인 까닭에 늘 수신과 공덕 쌓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대체로 인간이란 자기의 심상에 의해서 골격과 기색(氣色), 수염과 머리카락, 눈썹과 피부, 눈빛(眼色)까지도 심덕(心德)의 유무에 따라 변모해 간다.

만일 마음은 있으나 상이 없으면 형상은 밖으로 나타날 수 없다. 반대로 마음이 없어지면 형상도 자연히 마음 따라 멸(滅)해지는 셈이다.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옛사람들의 겉모습은 비록 짐승 같았으나 평소 심상을 잘 갈고 닦았기에 그 모두가 덕인(德人)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 사람들 겉모습이 얼핏 보기엔 사람같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짐승보다 못한 생각이 도사리고 있어 파렴치한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질고 착하지 못한 것의 모든 차이점은 이 겉모습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그 사람의 마음하나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겸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데카르트(1596-1650)는 이 심상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를 한 분인 것 같다. 그는 “남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은 얼굴을 아름답게 한다. 그러나 남을 원망하는 나쁜 마음은 고운 얼굴을 추악하게 만든다” “남을 증오하는 감정이 얼굴의 주름살이 되고,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고운 얼굴을 추악하게 만든다”고 했다.

양의 동 서를 막론하고 마음이 아름다워야 좋은 얼굴을 갖는 것은 진리다. 중국 전국시대때 실화 한 토막이다. 흐린 날씨에 봄비는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서당의 훈장은 출타를 하고, 학동들은 좋아라하고 뛰어논다. 그때 한 역술가가 비를 피하여 서당의 마루에 걸터앉는다. 그 술객은 배운 것이 역술이라 학동들을 보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들의 관상을 봐줬다.

“너는 장차 커서 관리가 되겠다. 너는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겠다. 너는 장사를 하되 크게 성공하여 거상(巨商)이 되겠다.” 등등, 그런데 유독 범증엄에게는 일언반구가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범증엄이 역술가에게 물었다. “저는 장차 커서 무엇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범증엄이 재차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내리던 비는 그치고, 역술가는 다시 길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 들녘을 지나는데 들 가운데 성황당이 보였다. 그런데 성황당 안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궁금하여 성황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성황당 안에는 어떤 어린 아이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천지신명이시여! 저는 장차 커서 경세가(經世家)가 되어 치국안민(治國安民)의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제가 장차 커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차선책으로 사람을 살리는 의원이라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단히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너무 애처롭고 간절한 기도였다. 자신의 몸을 내던지고 죽기를 각오한 처절한 기도는 몇 시각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그 아이는 바로 서당에서 관상을 보아주었던 범증엄이라는 학동이었다. 역술가는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하며 후회를 했다. 그리고 학동을 불렀다.

“관상이 불여심상(觀相 不如心相)이라! 관상이 마음의 상만 못하다. 다시 말하면 심상이 불여용심(心相不如 庸心)인 것이다. 너의 마음의 상이 관상을 능가한다. 너는 앞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그가 바로 전국시대 때 유명한 재상 범증엄이다.

그렇다. 관상이 심상만 같지 못하고, 심상이 덕 상만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덕 상도 바로 용심(庸心, 用心)에 달려 있다. 용심이 바로 마음공부다. 마음을 바로 써야 덕 상도 만들고 심상도 만들며, 관상도 좋아지는 것이다.

그 마음을 잘 쓰는 공부란 마음을 요란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으며 그르지도 않게 쓰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마음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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