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프란치스코 교황의 섬김정신, 벌써 잊었나?

“무릇 크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사람의 일을 해야 한다”(欲爲大者當爲人役)는 성현의 말씀이 있다. 그런데 출세는 하고 크고자 하는 사람들이 남을 섬기기는커녕 크기도 전에 군림하려 드니 세상이 잘 될 리가 있겠는가? 특히 성직자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은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남의 위에 서고자 하는 사람은 배운 만큼 사회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운 사람들보다 지도자나 종교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건강한 척도를 조정하는 자세는 섬김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스스로 노력하고 힘써 얻은 위치라 해도 세상의 조력 없이는 이룰 게 아무것도 없다.

보은은 물질이든 정신이든 사회 환원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거꾸로다. 정치인은 둘째치고 성직자라고 하는 직업 종교인들이 사회의 안녕은 고사하고 지탄대상이 되는 세상이 돼버렸다.

인도 우화에 ‘생쥐이야기’가 있다. 어느 도사가 막 생쥐를 채가려는 솔개를 보았다. 급히 달려가 욕심 많은 솔개 주둥이에서 작고 가여운 생쥐를 빼내 주었다. 그리고 숲 속에 있는 자기 토굴로 데리고 가서 먹을 것을 주며 보살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토굴로 다가오자 도사는 생쥐를 사나운 고양이로 변하게 했다. 그날 밤, 숲 속에서 들개가 짖어 대자 고양이는 도사에게로 달려가 숨었다. 도사는 다시 고양이를 커다란 들개로 변하게 하였다. 그러자 굶주린 호랑이 한 마리가 그 들개를 보고 달려왔다. 도사는 다시 손짓 한 번으로 들개를 늠름한 호랑이로 변하게 했다. 더 이상 두려울 것 없는 이 생쥐 호랑이는 온 종일 숲 속을 돌아다니며 다른 짐승들 위에 군림하려는 것이 아닌가? 도사는 호랑이를 꾸짖었다. “너는 내가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생쥐였다. 그런 네가 그렇게 우쭐거리고 다닐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 호랑이는 분하고 창피한 마음으로 은혜도 잊어버리고 도사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날보고 생쥐였다고 말하는 놈은 누구든 죽여 버리겠다.” 그러자 도사는 “배은망덕한 놈! 냉큼 다시 생쥐나 되라” 하며, 다시 생쥐로 만들어 버렸다. 생쥐는 숲 속으로 달아나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도사는 숲 속에 앉아 생각하였다. ‘크다는 것과 작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어리석은 이는 자신을 높이는데 몰두한다. 그리곤 상대를 욕하고 비난하며 지혜로운 자와 싸워 이기려 한다.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데 인색하지 않는다.

중국 전한(前漢) 때의 학자이며 왕인 회남자(淮南子, ?~BC 123)는 말한다. “강물이 모든 골짜기의 물을 포용할 수 있음은 아래로 흐르기 때문이다. 오로지 아래로 낮출 수 있으면 결국 위로도 오를 수 있다.”

얼마 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태도는 우리 국민들이 염원하지만 갖지 못하는 지도자상을 보여주었다. “최고의 권위는 섬김”이라고 말해온 교황은 고통받는 자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통해 한국사회에 큰 감동을 주었다.
8월16일 서울 광화문광장 시복(諡福)미사 카퍼레이드 때 교황은 차에서 내려 세월호 참사 가족으로 단식중인 김영오씨를 만나 위로했다.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는 위안부 피해자, 강정마을 주민, 쌍용차 해고노동자, 밀양 송전탑 건설 예정지역 주민, 용산참사 피해자, 새터민 등 한국 사회의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초대했다. 그들이 현행법을 어겼는지, 어떤 이념적 성향을 가졌는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교황에겐 그들이 이 사회의 약자이고 소외받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치인, 주교 등 고위직 인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이들을 먼저 챙겼다. 들르는 곳마다 환경미화원, 시설관리원 등을 만나 일일이 선물을 나누었다. 교황이 ‘소울’ 소형차를 타고 사회적 약자를 챙기는 말과 모습에 한국사회에 던져준 메시지는 보통 큰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 장벽을 극복하고 분열을 치유하며 폭력과 편견을 거부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는 군림이 아니라 섬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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