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웅의 풍수유람] 日 ‘사무라이 로망’ 낭인 복수극 ‘주신구라’ 속으로
일본인들이 무사도에 대한 로망과 환상을 보여주는 가장 뛰어난 이야기를 꼽으라면 단연 충신장(주신구라)이다. 이 주신구라는 도쿠가와 막부 5대 쇼군 쯔나요시(德川綱吉, 1680년 ?8월~1709년 ?1월) 통치시절인 1701년 봄 3월14일, 쇼군이 살던 에도 성에서 일어난 칼부림 사건이 그 발단이다. 그 사건 후 1년 10개월 뒤에 일어난 낭인들의 복수극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1748년 일본의 가부키[歌舞伎] 극으로 만들어져 아직까지도 그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소설가이며 문학평론가였던 마루야 사이이치(丸谷才一)는 “일본인에게 가장 친숙한 문학은 <만엽집>도, <겐지 모노가타리>도, <헤이케 모노가타리>도, 바쇼(芭蕉)도 아니고 <충신장>의 전설과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작품” 이라고 말할 정도로 충신장은 일본사회 내에서의 영향력이 크다.
이른바 ‘마쯔의 낭하사건(松の廊下事件)’이라 불리는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아코(赤穗 : 현 효고현 아코씨) 번주(藩主)였던 아사노 다쿠미노가미 (淺野淺野內匠頭)가 막부의 수석 의전관인 기라 고즈케노스케(吉良上野介)를 칼로 찌른 사건이다. 번주는 애초에는 그를 죽이려 했지만 가벼운 상처를 입히는데 그치고 말았다. 쇼군의 거처인 성내에서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나자, 막부는 당일 아사노에게 할복과 영지 몰수라는 가혹한 벌을 내렸다. 주군의 돌발적인 행동은 결국 번의 몰락을 가져왔고 그에 따라 아코번의 가신들은 낭인의 신세가 되고 만다. 이에 가신(무사)들은 주군의 복수를 꾀한다. 200여명(혹은 300여명이라고도 함)의 아코 무사들 중 47명의 무사들이 이 복수극에 가담하여 1년 10월 후인 1702년 월력 12월 14일 새벽, 사건의 단초인 기라의 집에 쳐들어가 그의 목을 자르고 주군의 원수를 갚은 무사들은 막부로 가 자수한다. 그리고 막부는 50일 후, 아코의 무사들에게 모두 할복 명령을 내렸다.
주신구라란 제목부터 사건을 둘러싼 진위여부는 알 길이 없지만, 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소설, 연극, 영화 등의 각종 장르에서 다양한 버전의 주신구라가 끊임없이 만들어 지는 것은, 주신구라에 대한 일본인들의 환상과 로망이 얼마나 강한가를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증좌다.
그런 주신구라에 대한 300년 동안 일본인들도 지나쳤을 이삭(落穗)이 혹 있지나 않을까 하고, 조선의 풍객(風客)으로 주신구라의 유적을 둘러봤다. 풍수적 눈으로 본다면, 주신구라의 무사들이 지금까지 추앙 받는 것은 그들 묘소가 풍수적으로 명당에 자리하고 있음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이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