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웅의 풍수유람] 아베 총리 극우정치 뿌리, 외조부 기시 수상 묫자리를 가다
[아시아엔=손건웅 풍수유람가] 일본은 1885년 12월 22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0~1909.10)가 초대 총리로 취임한 이래, 현재의 아베 신조까지 130년 동안 97대 62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62명 중에는 지금도 생존해 있는 분이 13명이다.
우리는 전직 대통령이 서거하면 국장(國葬)으로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은 국장을 지내는 경우도 있지만, 안장장소는 개인적으로 결정하는 경향이다.
일본의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묘소가 있지만, 현직인 아베 신조의 묘소는 없는 것이 당연하다. 아베가 총리가 되도록 풍수적 뒷받침을 해준 외조부와 부친 묘소를 살펴본다.
참고로 총리대신을 가장 많이 배출한 현은 야마구치현(山口?)으로 8명을 배출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해서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아베의 작은 외할아버지 사토 에이사쿠, 그리고 아베 신조를 포함하여 8명이다.
메이지(明治)에는 원훈이나, 조선에는 원흉으로 평가 받는 인물로, 초대를 포함해 4번의 총리대신과 초대 조선통감을 역임하면서 일본과 조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부친 하야시 쥬조(林十?)는 농부였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막부시절, 농민의 목숨이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였다. 그의 부친이 하급무사인 이토(伊藤)가의 양자가 되면서 이토란 성을 갖게 되고 신분도 한 단계 상승했다. 16세에 쇼카 손주쿠(松下村塾)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사숙에 문하생이 된 것이 이토 히로부미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요시다 쇼인은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회복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과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반막부(反幕府)활동을 하다가 1859년 30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훗날 그의 제자들은 메이지유신의 핵심인물이 되고, 조선정복의 야욕을 실행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격살당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의 원훈이며, 일본헌법 제정에 공로자로 추앙받지만 조선과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 수괴일 뿐이다.
그의 묘소는 신주쿠에서 JR선을 타고 30여분 남행하면 시나가와라는 지역(品川?西大井 6-10-18)에 있다. 이 곳은 1년에 단 3일만 개방한다고 한다.
좌측 사진의 모습처럼 역시나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이리저리 배회하며 철창 틈 사이로 사진도 찍고, 혈처의 기운을 확인해 보니 그의 삶의 댓가인 듯 엄청난 대흉지에 정확히 걸렸다.
남편 묘에서 좌측으로 7~8m 떨어져 있다. 상당한 역량의 대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이토는 첫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두번째 결혼한 게이샤(예기, 藝妓) 출신의 우메꼬가 정실이다. 우메꼬는 두 딸을 낳았는데, 차녀만 제대로 장성하였다. 사위는 장인 이토 히로부미의 배려로 장관까지 지냈다.
이토의 여성편력은 유명한데, 대흉지에 묻힌 그의 묘소의 영향인지 후손들의 정황은 지리멸렬이다. 창살 틈으로 보이는 비석의 이름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동네사람에게 물어보니, 히로부미의 오쿠상(부인)이 맞다고 한다.
현재 아베 총리의 부친과 외할아버지는 고향인 야마구찌현 선영에 모시지 않았다. 신주쿠에서 서쪽으로 110여 km 떨어진 후지산 근처의 후지영묘(?士?園)에 안장하였다. 장인과 사위가 이웃하여 자리하고 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외무상과 총리를 각각 2번 역임했다.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정통 관료로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의 고위관료가 되었다.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주도하는 등 만주의 영구지배를 위한 정책을 수립했다.
한국의 만주인맥과의 인연은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군인은 아니지만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도조내각의 각료로서, 종전 후 A급전범으로 분류되었으나 미소냉전의 와중에서 석방되었다. 동생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도 총리를 역임했고, 현 총리 아베 신조가 그의 외손자다.
묘소는 엄청난 대명당이다. 이 묘소가 외손자인 아베에게 상당한 뒷심이 되고 있다는 게 필자의 풍수적 판단이다.
장인인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 묘소 옆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다선 국회의원으로 여러 부처의 장관과 자민당 총무회장, 간사장 등을 역임하며, 총리감으로 일찌감치 꼽히는 등 황태자로 불렸다. 총리 당선을 위해 1990년 2월, 중의원 선거에 자파 소장파 의원을 다수 당선시키고, 고르바초프의 일본방문에 주력하는 등 외교활동에 노력했다. 하지만 1990년 9월 암 진단을 받고, 이듬해 사망했다. 생전에 총리의 꿈은 무산되었지만, 차남인 아베 신조가 총리로 3번이나 역임하고 있다. 셋째 아들은 4선 국회의원으로 기시가(家)의 양자로 입적했다.
어느 대학의 풍수교수가 나가도시(長門市)에 있는 기시와 아베의 선영을 다녀와서 이런 말을 했다.
“강 건너에서 바라본 (아베) 선영의 형국은 활짝 핀 모란꽃과 같은 모란만개형(牧丹滿開形)이다. 외할아버지(기시) 가문 선영보다 더 큰 풍수적 ‘포스’(force)를 보여준다.
외가보다 친가의 풍수가 더 힘이 세다는 뜻이다.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많다고 외국 언론들이 비판한다.풍수적 관점에서 아베 총리를 ‘변명’할 것이다.”
필자는 나가도시를 간산하지는 않았지만, 아베의 외가에서는 이미 2명의 총리대신(기시와 사또, 통산 5회, 11년 역임)을 배출했는데, 장관 한 명을 배출하고 총리를 목전에 두고 사망한 아베가의 선영이 힘이 더 세다니 납득키 어려운 주장이다.
작금의 아베 신조의 극우편향 행보는 양식있는 사람들의 깊은 우려를 낳고 있는데, 풍수를 거론하며 그를 변명하는 것이 생뚱맞다. 풍수는 인간의 윤리와 사고(思考)를 반영하지 않는다. 자연현상일 뿐이다. 지금의 아베 총리는 나가도시의 풍수적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베 신조가 역대 어느 총리보다 막강한 정치력을 발휘하는 추동력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첫째 일류 대기업을 추동할 역량의 혈처에 자리한 그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묫바람, 둘째 역대 어떤 수상보다 뛰어난 혈처에 자리한 그의 부친 아베 신타로의 묫바람 때문이라고 본다. 좋은 묘소가 복수로 있으면 단순 덧셈이 아니다. 풍수파워는 상승작용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