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웅의 풍수유람] “장개석, 부친 묘 덕에 승승장구…모친 합장 안한 게 화근”
[아시아엔=손건웅 풍수유람가, <풍수로 세상을 보다> 저자] 장개석은 1887년 10월, 절강(浙江)성 봉화(奉化) 시코우(溪口)에서 태어났다. 집 뒤로는 경승지로 유명한 설두산이 있고, 앞에는 섬계(剡溪)가 흘러 산과 물의 조화가 이뤄진 아름다운 고장이다.
그의 부친 장고총(?肇聰)은 수완 좋은 염상(鹽商)으로 재물도 상당히 모았다고 한다. 9살에 부친을 잃은 장개석은 17살이 되자 혁명을 한다며 고향을 떠난다. 20살에 보정(保定)군사학교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 전쟁터를 누비는 융마(戎馬)일생을 보내게 된다.
그는 원세개(袁世?)와 군벌세력을 타도하려는 손중산의 혁명파 일원이 되었다. 장개석은 혁명의 대오에 서서 그의 20대를 보내고, 서른이 넘어서는 손중산의 신임을 얻어 37살에 황포군관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제자들은 이후 그가 군권을 장악하는데 크게 도움을 준다. 1926년 7월1일, 장개석 군사위 주석은 중국통일을 위한 북벌을 선언한다. 남방의 잡다한 세력은 8개군 10만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군사를 이끌고 장작림과 오패부, 손전방 등의 100만에 달하는 북방군벌을 파죽지세로 격파해 냈다.
1928년 12월, 동북3성의 실세였던 장학량이 장개석에게 복종을 선언함으로써 신해혁명 이래 수많은 군벌들이 할거했던 중국은 외형적인 통일을 이루게 된다. 1927년 장개석이 중국공산당을 소탕할 때, 주은래는 구사일생으로 도망갔다. 이때까지도 모택동은 역사의 무대에서는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였다.
1929년 군국주의 일본은 만주를 침략했고, 1931년 9·18사변을 일으켜 사실상 동북3성을 점령했다. 1932년에는 상해사변을 일으켜 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전쟁을 시작한다. 장개석은 일본군에 맞서는 항일전쟁과 중국공산당 토벌이라는 ‘내우외환’에 직면한다. 장개석은 이런 상황에서 모택동과 건곤일척의 조우를 하게 된다. 장개석의 고향 시코우(溪口)를 찾은 때는 청명절과 겹치는 시기였다. 경치도 빼어나고 장개석이 태어난 집, 즉 풍호방(豊鎬房)이 있다니!
모친의 묘소는 안내도가 있어서 바로 찾을 수 있었지만 부친의 묘소는 많은 사람들, 심지어 노인들에게 물어도 한결같이 모른다는 반응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자전거 릭쇼(인력거) 영업을 하는 기사 한분이 안다고 한다. 그가 쏟아내는 장광설은 연도별로 풀어내는 장개석-장경국 부자에 대한 ‘구라’였다. “우리 고장에서 2대에 걸친 총통이 배출되었는데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냐”는 식의 얘기였다.
‘장모묘도’(?母墓道)란 패방이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묘소가 있다. 장개석 모친 왕채옥은 10대 후반에 결혼했으나, 아이와 남편이 잇따라 사망하자 불문(佛門)에 귀의한다. 23세 되던 해 집안 친척의 중매로 장개석 부친과 결혼한다. 결혼한 지 10여년 만에 남편을 잃었다. 홀몸으로 집안을 잘 꾸리고 자식교육도 엄하게 하였다. 그는 임종시 남편과 합장하지 말 것을 유언한다.
자존심이 센 아들 장개석이 마음에 상처를 받을까 염려한 까닭이다. 이 묘소가 지금껏 잘 보존된 이유로는 장개석이 원래 묘소를 잘 꾸몄고 후에 모택동도 훼손하지 말도록 지시했으며, 공산당 정권이 장경국 총통에게 화해의 시그널을 보낼 때 이 묘소 사진을 찍어보내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장개석은 모친 묘를 위해 유명한 풍수가를 초빙해 모셨다고 한다. 중국의 자료를 검색해보면, 풍수가들은 모두가 이곳이 ‘대명당’이라고 한다. 다만 좌향을 잘못 잡아서 혹은 분금을 잘못 놓아서 장개석이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다는 구구한 주장들이 중구난방이다. 이 일대의 산 전체가 흉지다.
백호방의 대흉지 핵심에 모셨다면 장개석은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개석의 승승장구는 부친의 묘소에 연유한다. 북벌의 성공도 이 묘소의 발음과는 무관하다. 십수년을 떠맡은 항일전쟁의 부담과 일순간에 공산당에게 패퇴한 것은 모친의 묘소에 연유한다는 판단이 든다.
장고총의 자(字)는 숙암(肅庵)이다. 2번 결혼에 2번의 상처(喪妻)를 했다. 원래 부인 서씨(徐氏)와 계배 손씨(孫氏)를 합장했다. 3번째 부인이 장개석을 낳은 왕채옥이다. 부친은 9살의 장개석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중국 풍수가들이 장고총의 묘소를 정확히 감평한 내용은 본 적이 없다. 장개석의 입신양명은 이 묘소의 발음에 기인한다. 상당한 역량의 대명당이다. 만일 모친을 이곳에 합장하였다면 모택동에게 그렇게 허망하게 패퇴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수 밖에 없다. 공산당을 섬멸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군사작전이 실패하자, 장개석은 위초(圍剿)전략을 구사한다. 토비(土匪)나 다름없던 공산당이 막강한 무력을 보유한 국민당 군과의 정면대결은 자살행위였다.
1934년 10월, 공산당 지도부는 탈주를 결정한다. 동남부에서 출발한 8만여 대오는 밤낮으로 국민당 추격을 당하면서 11개 성(省), 18개 산맥, 24개 강을 경유하여 1여년만인 1935년 10월 서북부에 도착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출발 당시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일방적인 도망의 길이었다. 그때는 대장정이란 멋진 이름을 붙일 경황이 아니었다. 특기할 것은, 장정 출발 당시에 모택동은 지도급 인물이 아니였다. 1935년 1월 준이(遵義)회의를 통해 박고(博古)와 주은래(周恩來)를 밀어내고 모택동은 마침내 확고한 당권은 거머쥔다.
모택동 지시로 현재까지 보존 잘 돼
1936년 일본은 이미 동북3성에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전역으로 침략공세를 펼치던 시기였다. 항일전쟁을 위해 국공(國共)합작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난무했지만 장개석의 안내양외(安內攘外) 정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학량에게 섬북(陝北) 연안(延安)의 홍비를 토벌하라고 책임을 맡겼으나, 동북을 일본에 내어준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불만이었다. 1936년 12월 4일 장개석은 독려차 서안(西安)으로 날아갔다.
1936년 12월12일 새벽 5시, 양귀비가 목욕을 즐겼다는 화청지에 총성이 울렸다. 장학량이 병간(兵諫)이란 명분으로 장개석을 구금하는 인질극이 벌어졌다. 대문호 호적(胡適)은 “마적의 아들, 근본이 형편없는 소인배”라며 장학량을 격렬하게 비난했고, 세상은 경악했다. 장개석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국공이 내전을 중단하고 항일전쟁에 매진할 것을 선언한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공산당이 소생하는 순간이었다. 12·12서안사변은 중국 현대사를 바꿔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