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웅의 풍수유람] 안철수·홍준표 조상묘·최동원 납골당 가보니···
[아시아엔=손건웅 풍수유람가] 필자가 그동안 수많은 현장을 답사해 확인한 바로는, 공동묘지에도 대명당이 있고, 화장으로 모셔도 후손이 복을 받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공동묘지나 납골당에 모신 경우도 장소의 길흉에 따라 발복의 효과가 후손들에게 나타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예전에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죽어서도 묻힐 자신의 땅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동네 어디인가에 있는 공동묘지에 매장하고는 했다. 지금은 경제적 이유, 관리상의 문제 등으로 좋던 싫던 공동(공원)묘지에 모시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공원묘지에 대한 망설임이 여전한 것이 현실이고, 또한 공동묘지에는 명당이 없을 것이란 관념이 일반적이다. 하물며 화장(火葬)이 대세임에도 일부 사람들은 화장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가가 화장을 적극적으로 권장할 무렵, 풍수계에서는 ‘이제 풍수는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었다’는 말이 퍼지게 되었다. 기존의 풍수공부는 매장을 전제로 한 장법(葬法)의 공부였으니 크게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필자는 화장을 하여도 매장에 따른 풍수의 결과와 별반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공동묘지에도 대명당이 있고, 화장으로 모셔도 후손이 복을 받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아버지 잘 만나서 재벌이 되는 풍토는 없어져야 한다”며 재벌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주장한 것이 새누리당 홍준표 의원이었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을 뼛속까지 체험한 홍준표 의원의 어린 시절을 들어본 사람이면 그의 주장을 심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안정된 일자리가 없다보니 그는 초등학교를 5번이나 옮겼고,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어린 누이가 공장에 취업하여 생활비를 보탰다. 아버지는 현대중공업 야적장의 야간경비원을 할 정도로 빈곤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부친 사후, 홍준표 의원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검사로 재직하면서 ‘6공의 황태자’라 불렸던 인사를 구속시킴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국회에 진출하여 내리 4선의원이 되었으며 당 대표까지 역임하였다. 지금은 경남지사 직을 맡고 있다.
그의 부친 묘소는 돈이 없던 사람들이 매장하던 공동묘지이다. 비석을 세운 것도 후일에야 가능하였다. 그의 아버지 묘소의 역량이 그렇다. 시기와 인화가 잘 맞지 않아서 그렇지, 부친의 묘소로만 판단하면 홍준표가 대통령의 꿈을 가졌던 것이 무모한 꿈만은 아니였다. 공동묘지라고 명당이 없다는 생각은 버리시라.
지금은 부침을 겪고 있는 안철수 의원도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다. ‘안철수 신드롬’을 일으키며 전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던 안철수 의원은 컴퓨터 백신을 개발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외국계 백신업체가 거액의 제안을 했지만, 단호히 거절하고 컴퓨터 사용자들을 위하여 무료로 백신을 제공하였다. 안철수란 그릇의 바탕이 그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좌우로 나란히 모신 그의 조부모 묘소는 천하대지를 방불케하는 대명당이다. 묘소는 공원이라도 좋은 혈처가 있다는 증거의 하나로 들고 싶다.
이제 무학대사와 ‘무쇠팔’ 최동원의 사례를 살펴보자. 무학의 속성은 박씨이다. 그는 1344년 18세에 출가하여, 혜명(慧明)에게 불법을 배우고, 묘향산 등지에서 수도를 하였다. 1953년 원(元)의 연경으로 유학하여 인도승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군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 조선의 국도선정을 비롯하여 유명 사찰과 당대인들의 묘지소점에 이르기까지 조선 풍수계에 그가 남긴 족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새로운 왕조의 프레임을 제시한 인물이라면, 무학은 풍수와 예언등으로 이성계의 심리적 자신감을 고취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부도탑은 천하대지에 손색없는 대명당의 정혈에 정확히 자리한다. 승려였기 때문에 후손이 없으나, 수백년이 지나도 무학을 추모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소위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첨언하자면 부도탑은 오늘날 납골당의 원조라는 생각이다.
1970년대 초, 전국은 고고야구의 열풍으로 뜨거웠다. 지금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활약을 하는 선수도 있지만, 필자 마음속 최고의 선수는 단연 무쇠팔 최동원이다. 강한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150km를 상회하는 빠른 직구와 낙차 큰 커브가 일품이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혼자 7전 중에 4승을 올리는 괴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최고의 대우를 받던 선수였지만, 어려운 동료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야구선수 노조라고 할 수 있는 선수협 결성을 주도했다. 모든 구단으로부터 미운 오리신세가 되었다. 고교 선배인 YS가 대표시절 민자당 영입을 제의지만, 3당 합당은 부당하다며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의 납골항은 묘원의 주혈인 대명당에 정확히 안치되었다. 그의 생전에 부산시민들과 야구팬들은 그를 지켜주지 않았지만, 사후에는 이 명당이 그의 명예와 후인을 지켜줄 것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