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화 대척점] 위안부 보도 아사히 전 기자 ‘호랑이굴’ 뛰어들다
[아시아엔=정길화 MBC PD]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56)라는 일본인이 있다. 그는 그는 일본 고치현 출신으로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을 역임했다. 그가 사계에서 유명해진 것은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 출신인 김학순(1924~1997) 할머니가 겪은 통한의 역정을 최초로 아사히신문에 기사화하면서부터다. 이후 김 할머니는 공개된 자리에서 직접 기자회견을 해 2차대전 당시 일본 만행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여성과 인권에 관한 세계적인 의제로 부상하는 계기였다.
필자는 그와 약간의 인연이 있다. PD수첩을 제작하던 1998년 당시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으로 와 있던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당시 프로그램은 한국언론의 권언유착을 다루는 내용이었는데 우에무라 기자는 비교적 유창한 한국말로 한국의 정관계와 일부 언론의 유착 경향을 지적했다. 그는 이지적이면서도 수수한 인상에 친근감을 주었다. 나중에 그가 1991년 8월 예의 김학순 할머니에 대한 기사를 최초로 쓴 일본 기자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언론인으로서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저널리스트가 동시대의 지배율을 거부하는 기사를 쓰고 보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팩트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국익이나 국민 다수의 정서에 거슬리는 경우 진실과 타협 사이에 놓인 강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다. 황우석 박사를 다룬 PD수첩 방송 전후에 담당자들이 겪은 수난을 생각해 보면 알 일이다. 일본이라고 다르겠는가. 국익과 진실 사이에서 군위안부의 진상을 보도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역린’을 건드리는 일일 것이다.
지난해 1월 필자는 PD수첩을 제작 중이었는데 그 무렵 일본의 혐한(嫌韓)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도쿄 현지 출장을 가서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 특정집단에 대한 공개적 혐오 발언이나 시위), 혐한시위 단체 재특회 등을 취재해 ‘혐한, 일본은 무엇을 노리나’ 제하로 방송을 했다(2014.1.28). 당시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오프닝 멘트를 하기도 했고, 거리로 나온 혐한 시위대와 맞닥뜨리기도 했다. 아베 정권 이후 가파르게 진행되는 일본의 우경화를 현지에서 취재한 것이다. 이때 우에무라 기자와 연락이 닿아 지인들과 함께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당시에는 아사히신문에 재직 중이었다. 홋카이도 하코다테시의 지국장으로 있었는데 새 학기에는 고베의 한 여자대학교 교수로 가게 되었다면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인상은 그대로였다. 우리 일행은 도쿄의 한 이자카야에서 늦은 밤까지 환담을 나누었다. 그는 일본의 이른바 ‘네트우익’(특정 인터넷 사이트를 거점으로 하는 우익)이 헤이트스피치를 조장하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우리는 그의 대학교수 진출을 축하하며 덕담을 나누고 새 출발을 격려했다.
하지만 필자가 귀국한 이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교수로 가기로 했던 대학에서 돌연 임용계약이 취소됐다. 보수우익 계열의 시사주간지 <주간문춘>에 그를 공격하는 기사가 나면서라고 한다. 이 기사의 제목은 ‘위안부 날조 아사히신문 기자 (…) 여자대학 교수로’였다. 일본우익들의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자 대학에선 “기사의 진위와 상관없이 학교 이미지가 나빠질 것”이라며 교수채용을 없던 일로 돌렸다(<한겨레> 인터뷰). 날짜를 보니 도쿄의 이자카야에서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교수직 진출에 실패한 그는 홋카이도 소재 호쿠세이가쿠엔(北星學園)대학에서 시간강사를 맡았다. 우익들은 이것도 가만 두지 않았다. “우에무라는 국적(國賊·나라의 적)이다.” “‘아사히 날조’ 우에무라를 고용한 대학에 항의전화!” 극우세력의 온상이라는 일본의 한 인터넷사이트에 오른 글들이다. 우에무라의 기사가 날조라는 부분은 근거없는 것으로 밝혀졌는데도 일본우익들은 그의 아내가 한국인이며 그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장의 사위라는 신상을 들추어내면서 그를 비난했다. 표적으로 삼은 한 사람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모습은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이기도 하다.
시쳇말로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더니 “화약폭탄을 보내겠다”는 협박문까지 대학측에 우송되는 등 극우들의 준동이 잇따르자 지난해 10월 말, 호쿠세이대의 학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시간강사 우에무라를 신학기에는 재계약하지 않을 것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신이치 다무라 학장은 “테러위협 예방에 들어가는 인력 및 금전적 부담 등의 이유로 우에무라 강사와의 고용계약을 연장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임전(臨戰) 태세를 계속하는 것은 체력적으로 버겁다”(연합뉴스 보도)고 했다고 하니 학교가 받은 심리적 압박의 정도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무릇 세상에는 지켜야할 선이 있는 법이다. 일본의 광신적 국수주의자들은 우에무라씨의 10대 딸의 신상을 공개하고 “그녀를 자살하게 만들자”고 선동하기에 이르렀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의 사진과 실명, 주소가 “이런 아버지 때문에 일본인들이 고생했다. 자살로 몰아넣겠다”는 등의 내용과 함께 무차별적으로 인터넷에 올렸다. 해도 너무한 것이다. 그러자 반전이 왔다. 그가 기사를 썼을 때 태어나지도 않은 17세 소녀에 대한 도를 넘은 공격에 양식 있는 일본인들이 분노했다.
국면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후원자들이 나타나 모임을 만들었고, 한 시민은 SNS망을 통해 “호쿠세이대학을 응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일본사회의 분위기가 변했다. “협박에 굴복하면 헌법에 보장된 학문의 자유가 손상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일본판 “쫄지 마!”인 셈이다. 마침내 2014년 12월 호쿠세이가쿠엔대는 우에무라 강사가 2015년에도 계속 강의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 상식과 이성의 승리다.
이를 전후하여 우에무라는 일본 시사월간지 <문예춘추> 신년호에 수기를 게재했다. 그의 군 위안부 기사가 아사히신문에 실린 이듬해부터 그를 공격했던 월간 <문예춘추>다. 이번에 고베 쇼인여대 교수직을 좌절하게 한 것은 같은 계열의 <주간문춘>이었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 속에 뛰어든 셈이다. 그는 “반증을 위해 <문예춘추>에 수기를 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수기에서 그는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응시하려는 사람을 공격해 기를 꺾으려는 세력이 일본에 있다. 거기 굴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다. 너도 함께 일어서 맞서라고 젊은 날의 내가 외치고 있다”(동아일보 기사)고 했다. 정말 대단한 우에무라 다카시다. 그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일본 시민사회에 살아있는 양심과 한 지식인의 용기를 보며 숙연해진다. 문득 거울을 보며 부끄러움과 참담함을 느낀다. 그와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