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DK 개국 91주년에 돌아보는 ‘한류’와 ‘국뽕’
[아시아엔=정길화 방송인, 언론학 박사] 2월 16일은 방송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다.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이 개국했다. 한국 방송이 91주년을 맞은 것이다. 호출부호 JODK, 출력 1kW, 주파수 870khz였다. 당시 주요 방송내용은 일본어로 경제시황(주가와 물가 포함), 일기예보, 시사, 공지사항 등이었다. 우리말로 창, 민요, 동화, 방송극도 시도했다. 흥미로운 것은 설립목적이나 운영주체는 일제당국인데도 외형은 사단법인체의 민영방송이었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가 일본의 방송 설립형태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경성방송국은 명목상 사단법인으로 출발했지만 방송 체제는 국영이었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은 경성방송국이 고액의 청취료 수익에 의존해도 적자경영이 지속되자 타개책으로 1932년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을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로 개칭하고 총독부 체신국의 강력한 통제 하에 두었다.
JODK 방송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생활정보 위주로, 조선인들에겐 오락거리를 제공하면서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를 꾀했다. 박용규는 “일제시기의 방송은 해방 이후 국영방송제도와 관료적 통제구조 그리고 권력순응적인 방송인들의 체질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했다.
방송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다른 학설도 있다. 가령 ‘12월 17일설’이다. 즉 1924년 12월 17일 조선일보사(당시 사장은 월남 이상재)는 수표교에서 관철동까지 무선전화방송 공개 실험을 실시한 바 있다. 내용은 이동백의 ‘단가’ 독창, 박녹주의 판소리 열창, 홍명후의 바이올린 연주 등이 방송됐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박기성은 “조선일보사의 무선전화방송 공개시험이야말로 한국인의 기술로 성공한 첫 자주방송이므로 한국 방송의 기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강준만, <한국대중매체사>, 인물과사상사, 2007).
이렇듯 한국방송의 기점을 둘러싼 학계에서의 논의는 분분하다. 정진석은 “한국방송사의 기점은 JODK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1)일제 강점기에 이 땅에 방송이 존재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2)초기방송은 총독부의 선전과 홍보를 위한 내용 위주가 아니었다. 등을 예거하고 있다. 또한 서재길도 이 시기의 방송을 일본의 방송으로 판단하는 논리는 방송을 전적으로 송신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으로서 실제로 송출된 방송의 내용과 조선인 라디오 청취자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식민지 수탈론의 관점에서 일제 식민시기의 라디오방송을 “일본의 제국 방송의 일부로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본방송의 성격이 강하다”고 하여 우리 방송의 출발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각도 상존하고 있다. 여기에는 최창봉, 강현두, 김우룡 등이 같은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에 정통성을 부여하여 ‘우리 방송의 역사’라는 것과는 반드시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논란으로 인해서인지 지난 2007년 방송협회는 ‘한국’을 뺀 ‘방송80년’ 기념행사로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한국방송의 기점에 대한 콤플렉스가 깊다. 조선일보사에 의한 1924년 12월 17일 무선전화방송 실험을 굳이 한국방송의 기원에 포함시키려 하는 것도 그런 정서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거칠게 보아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지 수탈론 사이에서 걸쳐 있는 듯한 한국방송의 기원 시점은 그런 점에서 1942년 12월 27일에 발생한 단파방송 사건의 의미는 예사롭지 않다.
말하자면 방송전파를 수단으로 삼아 독립운동을 한 것이니, 일제가 도입한 방송을 방법으로 하여 보란 듯이 일제에 되갚아준 것이다. ‘인도에서의 크리켓의 탈식민화’를 고찰한 아르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를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정신이 오늘날의 한류에 이르렀다고 말한다면 이는 ‘국뽕’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