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민간인쇄조보와 근대신문의 조건

<사진=정길화 제공>

부전본의 기적적인 발견

[아시아엔=정길화 방송인, 언론학박사] 이른바 ‘간송본’으로 유명한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1446년)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훈민정음의 제자와 운용법 등을 설명한 해설서인 해례본(解例本)이 근 494년 만에 나타나자 이를 알아본 일제 때의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澗松) 전형필이 거금 1만원을 대금으로 치뤘다고 전한다. 그때 당시의 물가로 따지면 기와집 열 채 값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고, 지금의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30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라고 한다.

이 <해례본>은 ‘훈민정음 원본’으로 통하며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 하여 ‘무가지보(無價之寶)’라 불린다. 해례본의 발견으로 한글의 창제 원리가 밝혀졌고 음상과 음운체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간송본’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후 2008년에 상주에서 나타난 이른바 ‘상주본’은 소유권을 둘러싼 사연은 기구하지만 제2의 해례본인 셈이다.

이렇듯 부전불견(不傳不見)의 서책이나 유물이 후세에 발견되는 일은 실로 엄청난 일이다. 전란의 참화가 끊이지 않았던 한반도의 역사를 생각하면 기적이라고 할 만하다. 돌이켜 보면 실록 등에 이름만 전하고 실물이 전해지지 않는 서책들이 즐비하다. 고전문학을 보아도 제목은 있으되 내용이 없는 도솔가, 회소곡 등 부전(不傳) 고대가요가 무수하다. 이들의 실체가 확인되면 우리네 역사는 한결 풍요로울 것이다.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고금상정예문>도 그렇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고려 고종 21년(1234년)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한 기록을 토대로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물이 없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직지>(1377년)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는 공인 기록은, 말하자면 현존 서책 중에서 제일 오래된 판본이라는 얘기다. 지금이라도 <고금상정예문>이 발견되면 인쇄술과 금속활자를 둘러싼 세계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지난 4월 경북 영천 용화사 지봉 스님이 공개한 조선시대 ‘민간인쇄조보(朝報)’ 또한 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하다가 그 실체가 나타났다. 공개 직후 학계와 언론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고 화제가 되었다. 언론사, 서지학 등 사계 유관 분야 전문가의 검증 결과에 따라 이 ‘조보’는 세계 최초의 민간상업 활판일간신문으로 등극하게 된다.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본 <무구정광다라니경>,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에 이어 인쇄문화에서 또 하나의 개가를 올리게 되는 것이다.

440년 만의 민간인쇄조보 나타나다

조보를 연구해온 경남대 김영주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원래 승정원에서 ‘필사(筆寫)조보’가 배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관리의 임면 등 인사 행정 그리고 국왕의 거동, 경연(經筵) 등의 궁내의 소식이 실렸다. 관보성을 띤 필사조보는 통치의 편의성을 도모하려는 뉴스전달제도로서 일종의 ‘내부통보매체’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폐쇄적이었고 속기로 필사되어 주요 독자층인 사대부들이 구독하기에는 불편했다고 한다.

이러한 필사조보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선조 때에 이르러 민간에서 제작하는 인쇄조보가 등장했다. 1577년(선조 10년) 8월 서울에 사는 일군의 양민 식자층들이 의정부와 사헌부로부터 발행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승정원에서 매일 나오는 필사조보의 내용을 재구성하여 목활자본으로 인쇄조보를 발행해 판매했다. 그런데 이는 기록에만 있을 뿐 지금까지 실물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랬는데 440년 만에 불현 듯 나타난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비견할 만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조선조의 필사조보나 인쇄조보에 대한 연구가 부단히 진행되었다. 일부 실물이 전해지는 필사조보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실록 등에만 있고 실체가 없던 인쇄조보에도 사계의 온축(蘊蓄)이 계속되었다. 예의 김영주 교수는 1999년 조선조 민간인쇄 조보의 쟁점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 2008년에도 민간인쇄조보에 대한 추가적인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는 등 조보 연구를 계속 해왔다. 아마도 이번 민간인쇄조보의 실물 발견을 누구보다 반기는 입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지난 5월 27일 서강대에서 열린 언론정보학회에서 동아대 이범수 명예교수와 함께 연구한 ‘조선시대 민간인쇄조보(朝報)의 발굴과 언론사적 의의’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이번에 발견된 인쇄조보는 총 8면이다. 발행일은 정축년(丁丑年, 선조 10년) 11월 6일, 15일, 19일, 23일, 24일 등이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23일, 24일 자가 연속해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일간(日刊)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 내용을 분석한 결과 인물, 역사 사건, 연도 등이 ‘왕조실록’, ‘선조실록’ 등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조보의 크기는 가로 40㎝, 세로 29㎝로 소책자 형식이 아닌 타블로이드 판형이며, 한 면의 행수가 좌우 각 11행(도합 22행)이며 한 행에는 21∼22자가 들어간다. 김교수는 순한문으로 된 인쇄조보의 1일치는 2장 가량에 968자 내외로 추정했다. 그는 또 “당시 몇 부가 발행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부를 수백 명이 돌려 봤을 것”이라고 보았다. 요컨대 이번에 발견된 선조 당시의 인쇄조보는 영리를 목적으로 민간인이 발행하고 활판인쇄술을 채용하여 발행하였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상업일간신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김교수의 분석이다.

<사진=정길화 제공>

필화로 얼룩진 세계 최초 ‘활판인쇄 일간신문’

그런데 이 민간인쇄조보가 오늘날 더욱 각별한 것은 그 등장보다 퇴장이 극적이고 장렬하기 때문이다. 1577년 8월부터 시작된 인쇄조보의 발행은 불과 3개월 만에 선조에 의해 중단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당시 선조는 “내가 우연히 조보를 보건대(···) 매우 놀랄 일이다. 어째서 아뢰지 않고 마음대로 만들었는가”라고 질책하고 있다. 조정의 허가를 받고 인쇄조보 발행을 시작한 ‘민간사업자’들은 선조의 진노에 날벼락을 맞았다. 요즘 식으로 하면 주무부서 장관이 허가한 것을 대통령이 뒤집은 셈이다.

선조는 인쇄조보를 보고 “사국(史局)을 사설화(私設化)하고 국가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폐간 조치했다. 민간이나 외국에 국가 기밀이 빠져나가고 왕실의 체면이 구겨진다는 것이다. 선조는 배후를 색출하기 위하여 약 45일 동안 조보 관계자들을 취조한 뒤 30여 명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유배를 보냈다고 실록은 전한다.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상업일간신문’이라는 타이틀이 허망하다. 조선조 민간신문의 역사는 필화(筆禍)로 얼룩진 수난의 언론사다.

김영주 교수는 인쇄조보를 공개성과 영업성(판매), 독이성(인쇄)을 갖춘 새로운 정보전달매체로서 평가하였는데 당시에는 이런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인종비의 병환, 소전염병(癘疫;牛馬之疫)의 창궐, 혜성의 일종인 치우기(蚩尤旗)의 출현 등의 내용이 그대로 세간에 전파되는 것에 놀랐던 것일까. 필경 조정에서는 언로의 확장이나 정보의 유통보다는 봉건 왕조의 권위와 질서가 더 엄중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임금도 아닌 선조 때가 아닌가. 필화의 모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15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바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1592년). 신문 없는 정부, 언론탄압의 말로다.

지금까지 세계 최초의 일간 신문은 1660년 독일에서 발행된 <라이프찌거 짜이퉁 Leipziger Zeitung>으로 알려져 있다. 미디어의 역사를 돌아보면 뉴스를 전달하는 ‘신문’의 기원은 B.C. 59년의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다고 한다. 당시 로마에서는 원로원과 의회에서 무엇을 결정했는지 시민에게 알려 주는 발표문이 있었다. 이를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라고 하는데 공공장소에 벽보처럼 붙였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한대(漢代)에는 중앙의 소식을 지방에 알린 ‘저보(邸報)’가 나왔고 이것이 송대 이후 ‘조보(朝報)’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들을 신문의 원형이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근대신문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근대신문의 조건

T. 슈뢰더는 근대신문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주기성, 시사성, 보편성, 공공성을 꼽았다. 서구에서는 15세기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인쇄신문이 출현할 수 있었다. 슈뢰더는 17세기 초 독일에서 나온 ‘렐라치온(Relation)’이나 ‘아비조(Aviso)’가 근대신문의 조건에 합당하다고 보고 이들 신문이 출현한 1609년을 신문의 원년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들은 주간(週刊) 신문이었다. 독자들의 수요가 늘고 근대적 우편제도가 실시되면서 주간지들은 일간(日刊)으로 발전했다. 이후 일간지의 효시는 ‘라이프찌거 짜이퉁’(1660년)에게 돌아갔다.

한편 G. 키즐리히는 근대신문의 성립에 필요한 전제 조건으로, 첫째 활판 인쇄술의 발명과 점진적인 개발, 둘째 정보 가치가 있는 사건에 대한 지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려는 사람들의 준비 자세, 셋째 정기적이고 잘 정돈된 전령 및 우편업무의 조직화, 넷째 주기적인 소식의 입수가 중요한 사회집단의 존재를 지적했다. 이는 각각 인프라, 뉴스 전달자, 유통망, 수용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선조 때의 인쇄조보가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상업신문’으로서 라이프찌거 짜이퉁의 기록을 83년이나 앞당기려면 서지학적 측면은 물론 근대신문으로서의 조건과 특징에 대해서도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가령 같은 시기에 나온 관급 필사조보와 민간 인쇄조보를 비교했을 때 인쇄조보에 내용상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 또한 인쇄조보를 제작했던 이들이 언로(言路)로서의 인식을 가지고 자생적인 취재와 전달을 도모했는지, 나아가 적절한 인쇄 시설이나 주기적이고 안정적인 유통망이 확보되었는지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쇄조보가 발행된 임진왜란 이전의 사초는 대부분이 소실되어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기실 440년 만에 8면의 인쇄조보가 발견된 것만 해도 기적이다. 다만 인쇄조보가 세계 최초의 일간신문으로 공인받는다면 미상불 좋은 일이겠으나, 영욕의 한국 언론사에서 어떤 의미를 더해 줄 것인지도 성찰해 보아야 하겠다. 인쇄조보 이후 이 땅의 언론사에서 민간신문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1896년 독립신문이다. 그로부터 319년의 유폐와 단절이 지난 뒤인 것이다. 봉건왕조의 언론탄압이 빚은 상흔은 그렇게 깊고 오래갔다.

참고 문헌
김동민(2017), 「김영주 교수 “朝報, 세계최초 인쇄 신문 가능성 높다”」, 연합뉴스
김영주,이범수(2017), 「조선시대 민간인쇄조보(朝報)의 발굴과 언론사적 의의」, 언론정보학회
김영주(2008), 「조보(朝報)에 대한 몇 가지 쟁점」, 한국언론정보학회
이상길 외(2007), 『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사』, 한국언론재단
정길화(2017), 선조 때 인쇄조보, ‘세계 최초의 일간 신문’ 되나?, 세종경제신문
W. 파울슈티히(1998), 『근대초기 매체의 역사』, 황대현 옮김(2007), 지식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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