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유대교·이슬람교·기독교의 공통점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저쪽 코너에 호프집이 있어요.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면 막걸리집이 보이구요. 거기서 300m 직진하면 됩니다”라고 답한다.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저기 교회 보이시죠? 그 교회를 지나서 100m 가면 2층에 교회가 보입니다. 그 교회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됩니다.”

사람들에게 ‘+’ 가 그려진 카드를 보여주면 수학자는 ‘덧셈’ 이라 하고,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 목사는 ‘십자가’, 교통경찰은 ‘사거리’, 간호사는 ‘적십자’, 약사는 ‘녹십자’라고 대답 한다고들 말한다.

‘다름과 닮음’에 대해 살펴보자. ‘너와 나’의 다름은 ‘나’로 하여금 ‘너’를 자세히 보게 한다. 다름으로 인해 상처도 생기지만 다름만큼 서로를 오래 바라보게 한요. 다름은 불편을 낳기도 하지만 다름은 그 차이만큼 이해도 만들어 낸다. ‘너와 나는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다름을 서로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그 다름만큼 풍요로워질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품어준다면 ‘너와 나’의 다름은 닮음이 된다. 다름은 닮음과 닮지 않은 듯 닮은 두 얼굴이다.

서양종교의 뿌리는 아브라함으로 시작된다. 수메르 최강의 도시국가 우르가 아브라함의 고향이다. 다신교를 숭배하고 성적행위가 종교의식의 하나였던 시대로 고도로 발달된 물질문명은 타락과 부패와 음란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타락한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해 순수의 땅 광야로 보내게 되는 것이 유태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세 종교의 시발점이다.

아브라함이 여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무슬림의 시조가 되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 이삭은 유대인의 시조가 된다. 이슬람교의 주장에 의하면 알라와 여호와 하느님은 같은 신이다. 이후 유대교의 역사인 구약성경은 세 종교 모두의 경전이 되고, 이슬람교는 구약성경 중에서 코란에서 상충되지 않는 <모세오경>과 다윗의 시편을 경전으로 믿는다.

유태교 이슬람교 기독교 세 종교 모두 예루살렘을 성지로 여긴다.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로 ‘창조’와 ‘최후의 심판’, 그리고 ‘영원한 내세’라는 종교관 모두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는 세 종교는 원래 하나라는 것이 증명된다. 그런데 뿌리가 같은 기독교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말을 한다.

배타적인 기독교 문화에서 파생된 이 말은 신앙 또는 신조에 입각한 도그마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런 교조주의와 근본주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채 종교적 도그마에 취해 극단적인 사고를 하는 경우가 있다.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짓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천당과 지옥을 벗어나 예수님 그 자체의 모습을 바라볼 때 가치 있는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삶에서 옳고 그름의 잣대가 중요하지 않듯, 천당과 지옥이라는 규정 역시도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그릇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종교적 도그마로 인해 더욱 배타적이고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종교에서 벗어나 이성적이고 바른 시각으로 보기 위해서는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서양종교의 알파와 오메가인 예루살렘의 역사가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인하여 2천년의 세월을 반목과 분쟁으로 역사를 써왔다. 평화와 공존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틀림을 다름으로 인정하는 노력을 해야한다. 비단 종교만이 아닌 삶의 모든 부분에서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니체가 말한 “한 번의 삶에서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길이라는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는 진리는 어쩌면 우리가 평생 추구해야 한 번 닿을까 말까한 유일한 진실이 아닐까?

‘원융회통’(圓融會通)이란 말이 있다. 원효대사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의 핵심으로 서로 다른 쟁론(爭論)을 화합해 하나로 소통시킨다는 의미다. ‘원융회통’의 ‘원은 거대한 순환, 융은 화합, 회는 모임, 통은 의사소통’을 뜻한다. 한마디로 서로 모여서 소통을 통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나 사회가 다름과 틀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극한의 대립과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진리의 말씀은 하나인데 사람이 서로 다른 부분을 보기 때문에 여러 종파들이 생겨나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착하지 말고 본래 진리의 큰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교리나 언어에 집착하지 않으면 대립을 넘어서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것이 ‘원융회통’이다. 중도(中道)란 좌파와 우파 혹은 보수와 진보의 ‘중간영역’이 아니다. 즉 서로 다른 온갖 가치들을 겸허히 받아들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만물이 하나로 소통되는 원융회통의 정신이다. 지금이 바로 ‘다름과 틀림’을 넘어 종교나 사회, 세계가 원융회통과 중도의 길을 향해 달려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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