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원유가 폭락에도 생산 늘리는 이유는?
“목전 이익보다 세계 시장 점유율 높이는 게 더 중요”
1980년대 중반 원유가 추락때 생산량 대폭 축소로 재정적자 ‘교훈’
지난달 초만 해도 배럴당 100달러가 넘던 원유가가 80달러대 초반까지 폭락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원유 생산량을 줄이지 않고 있다. 이는 눈앞 이익보다 시장점유율을 높이려는 장기 포석에서 나온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사우디가 최대원유 수출국이라 생산량을 줄이면 가격이 상승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당분간 버텨보겠다는 전략을 택했다는 것이다.
사우디의 이런 선택은 1980년대 중반의 뼈아픈 실패 경험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사우디는 1980년대 중반 원유가가 배럴당 35달러 대에서 10달러 대로 추락하자 10여년간 재정적자에 허덕였다. 당시 이 위기를 헤쳐나가고자 사우디는 1일 생산량을 1천만배럴에서 250만배럴로 줄였다.
1973년 오일파동과 1979년 이란혁명 뒤 공급부족으로 원유가가 폭등한 것을 ‘교훈’으로 삼은 까닭이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의 상황은 중동 산유국이 세계 유가를 좌우했던 1970년대와 달랐다. 이미 북해 유전에서 원유가 생산되는 등 대체 공급원이 활발해졌다.
뜻대로 원유가가 오르지 않자 사우디는 1985년 결국 감산 전략을 철회했다. 이후 원유가는 수요 증가로 오히려 상승세로 접어든다.
야세르 엘그룬디 메들리 글로벌 어드바이저 연구원은 “사우디의 가장 큰 실수는 가격을 올리려고 원유 생산량을 줄였던 것”이라며 “감산 대신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써야 했다”고 분석했다.
저유가가 지속하면 결국 생산단가가 높은 쪽이 궁지에 몰린다는 것이다. 사우디의 원유 생산 단가는 세계적으로 낮은 편이었는데도 원유가가 내리자 조급히 감산을 결정했다가 호되게 당한 셈이다.
그러나 이번 원유가 폭락 국면에서 사우디의 대응은 과거와 사뭇 다르다. 오히려 1일 10만배럴을 증산하겠다고 나서 원유가 하락을 부추겼다. 사우디 정부는 최근 원유가가 배럴당 80달러까지 하락할 때까지 견디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셰일가스를 앞세운 미국과 전통적인 에너지 강국인 러시아 등 비(非)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산유량이 사우디에 육박한 것도 한 원인으로 풀이된다.
세계 경기위축으로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에 사우디가 증산은 물론 주요 시장인 아시아와 유럽지역에 원유 공급가를 넉달 연속 낮춘 것은 이들 비OPEC 산유국에 시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도의 방증이다.
이런 시장 환경에서 사우디가 감산한다 해도 원유가가 100달러 이상으로 오르리라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최근 수년간 고유가로 축적된 오일머니 덕분에 1980년대 같은 재정적자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러모로 사우디에겐 저유가를 버틸 수 있는 ‘체력’을 갖춘 것이다.
사우디는 미국과 정치적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수니파 원리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맞서 미국 주도의 국제동맹군에 참여한 마당에 석유시장을 뒤흔들어 얻는 이익보다 손해가 더 크다는 계산을 했을 수 있다. 시티그룹은 브렌트유가 배럴당 80달러를 유지한다면 미국 각 가정에 연 600달러의 감세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17일 “미국 소비자의 감세는 미국 정부가 러시아와 이란을 압박하려고 할 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