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년 말 어공 7년을 끝낸 후 여름휴가차 다산연구소가 기획한 <열하일기(熱河日記)> 기행을 다녀왔다.
사실 2013년과 2014년 연이어 연암 코스를 밟기는 했지만,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고 말았기 때문에 연암의 발자취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 있던 차였다. 뜨거운 여름, 열하(熱夏)에 다시 <열하일기> 기행에 도전한 이유다.
그런데 이번 열하일기 답사는 단둥에서 선양과 산해관을 거쳐 베이징까지만 다녀오는 1차 일정이었다. 39명이 함께하는 대규모 답사단이어서 버스도 대형이었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가야 할 곳을 못 가거나 보아야 할 것을 못 보는 아쉬움을 남기는 여행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6박 7일 동안 생계를 팽개치고 연암에 몰입할 수 있어 행복했다. 물론 오랜만에 집사람과 함께 여행하며 시도 때도 없이 금슬(?)을 뽐내는 것도 큰 보람이었다.
2.
우리 기행의 시발점은 신의주와 맞닿아 있는 단둥이었다.
연암 일기(日記)의 시작점은 현재의 신의주에서 북쪽으로 20km 정도 떨어져 있는 의주다. 연암이 술을 따라 기둥에 부으며 안전한 도강(渡江)을 기원한 통군정이 의주성 안에 있었다.

모두들 통군정을 보고 싶어 했다. 통군정을 조망할 수 있는 호산산성으로 달려갔다.
한여름 비지땀을 흘리며 숨차게 산을 오르는 고행도 마다하지 않고 산성 정상을 향했다. 과연 산성 망루에 오르니 압록강 너머 통군정이 있는 언덕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안개가 낀 것도 아니고 눈앞을 가릴 만한 건물도 없었건만 통군정은 보이지 않았다. 연암의 말대로 우리가 배를 빠르게 내젓고 있어 통군정이 아득히 사라진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통군정은 한여름 녹음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통곡할 일이었다.
문득 호산산성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우겨대는 ‘호랑이의 허풍’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산성 밑에 있는, 한 걸음만 내디디면 나라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일보과(一步跨)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과연 그곳은 한 발짝만 내디디면 북한 땅에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높고 두터운 철조망이 처져 있어 단 한 발짝도 옮길 수 없었다.

통곡할 일이었다.
문득 압록강을 건너던 연암이 역관 홍명복에게 던진 말이 떠올랐다.
“君知道乎
그대는 도를 아는가?”
그리고 연암은 말했다.
“道不他求 卽在其際
도는 다른 곳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경계에 있다.”
연암에게 경계는 강물도 아니고 언덕도 아닌, 그 둘이 맞닿는 ‘사이[際]’였다.
그러나 오늘의 일보과에서 경계는 한 걸음이면 닿을 듯하면서도 단 한 발짝도 건널 수 없는 철조망의 경계였다.
통군정을 뒤로하고 위화도를 감싸고 도는 압록강 하류, 단둥 중심가로 내려왔다. 우리 일행은 압록강 유람선에 올랐다. 강물 색깔은 오리(鴨)의 머리처럼 푸르지는 않았다.
해질 무렵 압록강 양안은 대조적이었다. 서안은 불빛이 찬란한데 동안은 어두컴컴했다. 동안에도 서안처럼 마천루는 없어도 제법 높은 아파트들이 즐비했다. 동안을 차지하고 있는 북한이 몇 해 전 대홍수의 참사를 어느 정도 극복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압록강 단교(斷橋)도 걸어보았다. 한일병합 이전인 1909년부터 건설해 1911년 완공된 이 다리는 만주 진출을 위해 일본이 건설한 인도 겸용 철교였다.
그 위에는 이른바 ‘항미원조’를 총지휘한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와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 조각상을 비롯한 항미원조군의 군상이 ‘평화를 위하여(爲了和平)’라는 구호 아래 집결해 있었다.
통곡할 일이었다.

3.
연암이 일기에서 기술한 대로 압록강은 황하와 양자강과 더불어 천하의 세 큰 강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암은 『황여고(皇輿考)』를 인용해 이렇게 적었다.
“天下有三大水 黃河 長江 鴨綠江也
천하에 세 큰 물이 있으니 황하와 장강과 압록강이다.”
그러나 백두산에서 발원한 그 큰 강물에는 도도한 흐름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여전히 한민족의 눈물이 실려 흐르고 있다고 느껴졌다.

『삼국지연의』의 「임강선(臨江仙)」에서 묘사된 양자강은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많은 영웅들을 강물 속으로 쓸어버리고 도도히 흐르는 망각의 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압록강은 어떨까. 한때는 대륙세력이 한반도로 진공하는 통로였고, 또 다른 때에는 해양세력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가도(假道)가 되어야 했던 비운 때문에 통곡하며 흐르는 ‘기억의 강’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뿐인가. 일제강점기에는 호구지책과 탄압을 피해 강을 건너는 행렬이 줄을 이었고, 남북분단 시대인 지금도 가난과 억압을 피해 강을 건너야 하는 현재진행형 디아스포라의 강이 아닌가. 참으로 압록강은 비운의 강이었다.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안동 임청각의 종손 석주 이상룡은 가산을 처분하고 일가족 전체와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살아서 두 발로 압록강을 다시 건너지 못했다.
1911년 망명한 지 79년이 지나서야 그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1911년 1월 한겨울, 석주 이상룡이 압록강을 넘어 단둥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 그는 <도강(渡江)>이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각오를 다졌다.
삭풍은 칼날보다 날카롭고
차가운 바람은 내 살을 에는구나
살이 에이는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으나
창자가 끊어지는데 어찌 슬프지 않으랴기름진 옥토 삼천리
그곳에 살아가는 백성 이천만
즐거웠던 우리 부모의 나라를
이제 누가 차지해버렸는가이미 나의 전답과 집을 빼앗고
다시 나의 처자식마저 넘보는구나
이 머리는 차라리 베일지언정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 없다집을 나선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압록강 물을 건넜구나
누구를 위해 더 머뭇거리겠는가
호연히 나는 가리라
연암 박지원은 돌아올 압록강을 건너 문명의 『도강록』을 남겼다. 석주 이상룡은 돌아오지 못할 압록강을 건너 비분의 <도강>을 남겼다.
연암에게는 요동 벌판이 호곡장(好哭場)이었지만, 석주 이상룡에게는 압록강이 호곡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