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릉하 회군
오늘 일정은 북진에서 대릉하를 건너 금주와 송산, 영원을 지나 산해관으로 들어가는 ‘일신(馹汛)’ 코스다. 연암이 신광녕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여정을 <일신수필>이라 이름 붙인 것처럼, 우리도 말을 달리듯 서둘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필을 쓰기는커녕 보고 싶은 곳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밤늦게야 진황도의 숙소에 도착할 판이었다.
대장정의 첫 일정은 대릉하 대교 도보 횡단이었다.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대릉하를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아침 인사를 건네는 현지 가이드의 얼굴은 전날 요하 대교를 건널 때만큼이나 상기되어 있었다. 요하에서 우리 일행에게 고구려의 기상을 느끼게 해주었다면, 오늘은 대릉하 유역을 초기 고조선 문화의 중심권으로 보는 견해를 현장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자부심 때문인 듯했다.
마흔 명을 태운 버스도 오늘 아침 ‘자여우(加油)!’를 한 듯 경쾌하게 달렸다. 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두 시간 가까이 달렸을 때였다. 갑자기 버스의 속도가 떨어졌다. 운전기사와 현지 가이드 사이에 심상치 않은 속삭임이 오가더니, 이내 당황한 목소리의 차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늘 걸어서 건너기로 한 다리는 대형 버스의 진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오던 길을 되돌아 판진시를 거쳐 영원성으로 곧장 가야 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시간 관계상 금주와 송산도 건너뛰어야 한다고 했다. 대형 버스가 들어가지 못한다니, 대릉하 대교라면서 실은 ‘대릉하 소교’였던가 싶었다. 우리의 ‘대릉하 회군’은 불가피했다.
버스가 왔던 길을 되짚어 달리는 동안 아쉬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초기 고조선의 강역을 떠올리게 한다는 대릉하의 도도한 물결을 보지 못한 것도 아쉬웠지만, 대릉하성 전투의 현장과 그 너머 금주·송산으로 이어지는 송금전투의 무대를 밟아보지 못한 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현지 가이드의 말처럼 송산에는 기자와 관련된 옛 전승도 남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강 하나를 건너지 못했을 뿐인데, 그 강을 둘러싼 수천 년의 역사가 한꺼번에 멀어진 듯했다. 그러나 보지 못한 강은 오히려 더 큰 물음으로 다가왔다. 영원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대릉하 유역을 둘러싼 고조선 강역 논쟁에 대한 관심은 깊어졌고, 대릉하와 요서회랑을 피로 물들인 대릉하성 전투와 송금전투의 참상이 눈앞에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 연암과 조선의 옛 강역
앞서 언급했듯이 연암은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왕검성일 가능성은 열어두었다. 왕검성이 곧 평양이라면 봉황성 일대 또한 옛 평양으로 불렸을 수 있으며, 패수 역시 요동 어디쯤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평양을 지금의 평양 한 곳에 고정해 놓고 패수를 압록강 안에서만 찾으려 한 조선 학자들을 매섭게 비판했다. “이로써 조선의 옛 강역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줄어들었다.”(是朝鮮舊疆 不戰自蹙矣)
이른바 연암의 ‘불전자축론(不戰自蹙論)’이다. 이는 패수의 위치를 어느 한 강으로 확정한 주장이 아니라,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 공간을 후대의 지리 관념 안에 가두지 말고 요동까지 열어놓고 살펴야 한다는 문제 제기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훗날 신채호와 정인보 등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 무대를 만주와 요동까지 넓혀 보려 했던 시각을 연상시킨다. 1960년대 리지린을 비롯한 북한 학계가 고조선의 중심 영역과 패수의 위치를 요동·요서 방면에서 찾으려 했던 연구와도 어느 정도 맥이 닿는다.
물론 연암은 후대 연구자들처럼 고고학 자료와 여러 문헌을 체계적으로 대조하여 패수를 대릉하나 요하, 난하 같은 특정 하천으로 확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문제의식은 오늘날의 고조선 강역 논쟁과 결을 달리한다. 그러나 패수를 대동강·청천강·압록강·태자하·대릉하·난하 등으로 보는 여러 견해가 여전히 맞서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연암의 불전자축론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듯했다.

대릉하 패수설을 믿는 현지 가이드는 영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 말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문헌에는 패수가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패수는 서해로 흘러가는 대동강일 수 없고, 낙랑군도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에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가이드가 말한 문헌은 <수경주>가 인용한 <수경>의 패수조였다. 그러나 <수경주>의 저자 역도원은 바로 그 동류 기록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패수는 서쪽과 서북쪽으로 흐른다고 설명했다. <한서> 「지리지」 역시 패수가 서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고 기록한다. 따라서 <수경>의 한 구절만으로 패수를 대동강으로 보는 견해를 부정하고 낙랑군을 만주로 비정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평양과 대동강 유역에서는 낙랑군의 평양 소재설을 뒷받침한다고 해석되는 수많은 낙랑계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연암의 경고까지 가볍게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고대의 지명과 강역을 오늘날의 국경 안에 선험적으로 가두고 문헌을 그에 맞춰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 제기만큼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한편 현지 가이드는 대릉하 중·하류에서 비파형 동검을 비롯한 청동 무기가 다수 출토되었고, 상류 지역에서는 홍산문화 유적도 확인되었다며 고조선의 강역이 대릉하 유역까지 미쳤다는 주장을 펼치고 싶은 표정이 역력했다. 다만 홍산문화와 고조선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으므로, 이를 곧바로 고조선 강역의 증거로 삼기는 어렵다.
연암은 압록강을 건너며 그토록 격정적으로 불전자축론을 펼쳤지만, 정작 대릉하를 지날 때는 더 이상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문득 연암이 환생하여 오늘날의 고조선 강역 논쟁에 뛰어든다면 과연 어느 편에 설까 궁금해졌다. 아마도 청나라 역관 쌍림의 말대로 덩치 큰 양반이었던 연암이라면, 확증편향에 매몰되어 이전투구로 변질된 논쟁에 선뜻 끼어들지는 않을 듯하다. 군자는 비례물언(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 영원성에서
한나절 차창 밖으로 눈 구경을 한 끝에 영원성에 도착했다. 먼 변경을 편안하게 한다는 이름의 영원성(寧遠城)답게 네모반듯한 내성은 네 성문과 성벽의 기본 형태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고루에 오르니 성 안 중앙에는 거대한 예술품으로 칭송받는 조씨 형제의 패루가 보였고, 성 밖 동쪽 계명산 정상에는 누르하치가 피를 토했다는 전설이 깃든 구혈대(嘔血臺)가 바라보였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영원성은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명대 고성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동서남북의 성문이 모두 갖추어진 성 안을 거닐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17세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 성이 1626년과 1627년,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잇달아 대군을 이끌고 공략하던 영원성이 맞나 싶었다. 영원성이 광녕에서 보았던 무너진 성벽의 잔해와 달리 성벽은 물론 성 안의 패루까지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문득 그 비밀은 원숭환이 성벽 위에 설치한 홍이포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영원성을 지키는 명군만 홍이포를 보유하고, 공격하는 후금군은 그에 맞설 만한 대포와 포병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1626년 누르하치는 수만의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영원성을 공략했지만 원숭환의 홍이포 앞에 성벽을 뚫지 못하고 물러났다. 후대의 전승은 누르하치가 포탄에 부상하여 계명산 구혈대에서 피를 토했다고 전한다. 그가 실제로 포탄에 맞았는지, 그 부상이 그해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이 생겨날 정도로 영원성의 패배가 누르하치와 후금군에 큰 충격을 준 것은 분명했다.
이듬해 누르하치를 계승한 홍타이지도 금주와 영원성을 잇달아 공격했지만 다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른바 영금전투였다. 후금은 여전히 명군의 홍이포에 맞설 만한 중포와 포병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영원성의 성벽이 남아 있는 이유를 홍이포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수리와 복원, 전쟁과 도시개발을 비껴간 우연도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두 차례의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거나 크게 파괴되는 것을 막은 데에는 홍이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원숭환은 영원성을 지켜내는 데 그치지 않고 성을 비교적 온전하게 후대에 넘겨준 셈이었다.
난공불락의 영원성을 지켜낸 원숭환은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그런데 불과 몇 해 뒤 그의 운명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뒤집혔다. 원숭환은 조선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진을 치고 있던 모문룡을 숭정제의 사전 허가 없이 처단했다. 모문룡이 명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가도와 조선 일대에서 권력을 남용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황제가 위임한 권한의 범위를 넘어선 독단적인 처분이었다. 숭정제는 이를 사후에 승인했지만 자신이 임명한 장수를 마음대로 죽인 원숭환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주와 대리인 사이의 불신이 시작된 것이다.
반면 홍타이지는 더 이상 난공불락의 영원성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데 집착하지 않았다. 몽골 방면으로 우회하여 장성을 넘어 북경을 직접 위협했다. 성을 깨뜨릴 수 없다면 성을 피해 가면 된다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원숭환은 관녕군을 이끌고 밤낮없이 달려와 북경 인근에서 후금군을 막아냈다. 그러나 후금군이 수도 성 아래까지 이르렀다는 사실만으로도 명 조정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때 홍타이지가 원숭환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흘렸다는 유명한 반간계 이야기가 전한다.
원숭환의 몰락을 반간계 하나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모문룡 처형과 후금과의 비밀 화의, 북경의 위기를 막지 못했다는 책임, 숭정제의 뿌리 깊은 불신이 이미 겹겹이 쌓여 있었다. 반간계가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은 의심을 새로 만든 원인이라기보다 쌓여 있던 의심에 불을 붙인 마지막 계기였을 것이다.
원숭환은 졸지에 역적으로 몰려 체포되었고 이듬해 북경의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되었다. 당시 기록에는 그를 매국노로 믿은 백성들이 잘려 나온 그의 살을 사서 날로 먹었다는 끔찍한 이야기까지 전한다. 사실과 과장이 얼마나 뒤섞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과 몇 해 전 구국의 영웅이었던 사람이 순식간에 천하의 역적으로 뒤집힌 당시의 광기를 보여준다.

결국 영원성의 영웅은 성벽은 온전하게 지켜냈으나 자기 목숨은 지켜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성 안에 우뚝 서 있는 조가패루의 주인공 조대수는 어떠했을까.
조대수는 원숭환의 부장으로서 영원성의 수축을 감독하고 두 차례의 방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원숭환이 체포되자 자신들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조대수와 관녕군은 명령 없이 산해관 동쪽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숭정제의 사면을 받고 돌아온 조대수는 후금군이 점령했던 난주와 영평 일대를 탈환하는 공을 세웠다.
그 공적을 기리는 패루가 1631년 영원성 안에 세워졌다. 패루 남쪽에는 충성스럽고 곧으며 담대하고 지혜롭다는 뜻의 ‘충정담지(忠貞膽智)’, 북쪽에는 오랑캐에게 유린된 땅을 깨끗이 회복한 공훈이라는 뜻의 ‘곽청지열(廓淸之烈)’이 새겨졌다.
그런데 패루가 세워진 바로 그해 조대수의 운명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대릉하성을 지키다가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영원성에서 홍이포에 좌절했던 후금은 불과 5년 만에 자체 제작한 홍이포를 명군에게 쏘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성을 포위하고 구원군과 보급로를 차단하여 대릉하성을 굶어 무너지게 했다. 패배에서 배운 후금이 어느새 명의 무기와 전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조대수는 금주성을 바치겠다는 명목으로 돌아간 뒤 다시 명나라 장수로 싸웠다. 그러나 10년 뒤 송금전투에서 홍승주의 구원군이 무너지자 금주에서 두 번째로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홍타이지는 자신을 한 차례 속였던 조대수의 항복을 다시 받아주고 후하게 대우했다. 조대수는 다시 명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의 가문은 청조의 한군 기인 명문가로 편입되었다.
원숭환은 성을 지키고 목숨을 잃었지만 조대수는 두 번 항복하고 목숨을 보전했다. 그런데 오늘날 영원성에는 죽은 원숭환의 이름보다 두 번 항복한 조대수의 패루가 더욱 당당하게 남아 있었다. ‘충정담지’와 ‘곽청지열’이라는 글자가 그의 이후 운명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역사의 기묘한 반어처럼 다가왔다.
영원성에서 명은 홍이포로 후금의 기병을 막았다. 그러나 후금은 패배에서 배우고 홍이포를 스스로 만들었으며, 성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대신 우회하고 포위하고 항복을 끌어냈다. 영원성은 명이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의 학습 경쟁에서는 점차 뒤처져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성이기도 했다.
연암도 영원성을 거쳐 갔다. 조씨 집안의 두 장수 조대수와 조대락을 기념하는 패루의 예술성에 감탄했다. 나무를 한 토막도 쓰지 않고 돌로 추녀와 도리, 들보와 서까래까지 만들어낸 솜씨가 거의 사람의 힘으로 미칠 수 없을 만큼 정교하다고 했다.
그러나 연암의 시선은 패루의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원숭환과 조대수의 행적을 되짚었고, 조대수의 아버지 조승훈이 임진왜란 때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조선을 구원하러 왔던 인연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패루 앞에서 한마디를 남겼다. “이제 그들의 패루만 우뚝 섰을 뿐 가문의 명성은 벌써 무너져 부질없이 후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그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결국 영원성의 조가패루는 조선 사행단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웃음거리 이면에는 ‘오랑캐’가 승리한 비결도 숨어 있지 않은가.

- 산해관에서
영원성을 나와 다음 목적지였던 맹강녀 사당으로 향했지만, 시간 관계상 들르지 못했다. “관외의 장대를 보지 않고서는 장수의 위엄과 높음을 알지 못한다”는 산해관 밖 장대도 그대로 지나쳤다. 산해관 입장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하는 일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과연 일신(馹汛)의 코스다웠다.
장대를 지나치면서 연암의 기록 한 대목이 자꾸 떠올랐다.
“대개 장대를 올라갈 때는 한 계단씩 차례로 밟고 올라가기 때문에 위험을 모르고 있다가, 내려오려고 눈을 들어 한 번 바라보면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 서 있음을 깨닫고 현기증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그 높이는 눈에서 생기는 것이다.
벼슬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바야흐로 벼슬이 올라갈 때는 한 등급, 반 계단이라도 남에게 뒤질까 두려워 서로 밀치며 앞을 다툰다. 그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자리에 이르면 마음에는 두려움이 생기고 처지는 외롭고 위태로워진다. 앞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뒤로는 천 길 낭떠러지이며, 붙잡거나 도움받을 희망마저 끊어진다. 내려오고 싶어도 내려올 수 없다. 역대의 모든 벼슬아치가 그러했을 것이다.”
공직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유난히 뇌리에 깊이 박히는 말이었다.

산과 바다를 잇는 좁은 길목을 틀어막은 산해관은 과연 천하제일관이었다. 산해관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세 겹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 관문의 무지개 모양 문미에는 ‘위진화이(威鎭華夷)’, 둘째 관문에는 ‘산해관(山海關)’, 셋째 관문에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글자가 걸려 있었다.
연암의 기록에 따르면 세 사신은 이곳에서 모두 가마의 덮개를 걷고 문무관의 반열을 갖추었다. 천하제일관 편액이 걸린 제3관문 안쪽 익랑에는 세관과 수비 관리들이 앉아 사람과 말을 점검하고, 봉성에서 작성한 청단(清單)과 일일이 대조했다. 중국 상인과 여행객의 이름과 거주지는 물론 물품의 종류와 수량까지 장부에 기록했다니, 사행단이 들어올 때마다 관문 앞에는 긴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을 터이다.
연암이 산해관을 바라보는 눈은 남달랐다. 그는 장관론을 펼치기보다 안보론을 논했다.
“오호라! 몽염은 만리장성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으나 정작 진나라를 멸망시킨 오랑캐는 시황제의 아들 호해(胡亥)였으니, 집 안에 오랑캐를 키운 꼴이었다. 중산왕 서달은 산해관을 설치하여 오랑캐를 막았으나 오삼계는 관문을 열어 오랑캐를 맞아들이기에 바빴다. 천하가 무사태평한 오늘날에는 산해관이 한갓 상인과 여행객에게 세금이나 거두어 비웃음을 사고 있으니, 내가 산해관에 대해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진나라를 무너뜨린 것은 장성 밖의 오랑캐가 아니라 궁궐 안에서 자란 호해였고, 명나라의 운명을 바꾼 것도 산해관을 공격한 청군이 아니라 스스로 관문을 열어 준 오삼계였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성벽의 높이가 아니라 그 성벽을 맡은 사람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문득 압록강가에서 보았던 ‘호산장성이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라는 푯말이 떠올라 쓴웃음이 나왔다. 세상이 아는 만리장성은 동쪽 산해관에서 시작하여 서쪽 가욕관(嘉峪關)으로 이어지는 장성이 아니었던가. 오늘날 중국은 요동변장까지 명대 만리장성에 포함하여 압록강변 호산장성을 그 동쪽 끝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중원의 대장부들이 오랑캐를 막겠다며 오랑캐의 땅 안으로 들어와 성을 쌓았다는 말인가. 장성의 길이는 역사의 기억만큼이나 자꾸 길어지는 것인가.
마오쩌둥이 1935년 장정 도중 육반산을 넘으며 지은 「청평악·육반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不到長城非好漢.
중원의 대장부들이여, 산해관 장대에 올라 호연지기나 쌓을 터이다.

- 노룡두에서
숨 가쁘게 입관한 뒤 둘러본 산해관은 그야말로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지 가이드에게 좀 더 머물자고 조르거나 군소리할 형편도 아니었다. 어둠이 입해석성(入海石城)을 삼키기 전에 노룡두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서둘러 산해관을 출관했다. 노룡두의 관문은 영해성(寧海城)이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가까스로 도착해서 안심한 탓일까. 영해성은 순간 ‘영심성(寧心城)’으로 읽혔다.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는 성이었다.

야간 조명을 받은 3층 누각 징해루(澄海樓)는 경복궁 경회루를 연상시켰다. 검푸른 바다가 출렁이는 한가운데로 깊숙이 파고든 입해석성이 그 앞에 있었다. 연산산맥을 타고 달려온 만리장성이 발해에 머리를 들이민 형상이었다. 과연 용머리, 노룡두(老龍頭)라 부를 만했다.

입해석성 초입에는 천개해악비(天開海嶽碑)가 우뚝 서 있었다. ‘하늘이 산과 바다를 열었다’는 뜻이다. 연산에서 내려온 장성이 발해로 들어가는 노룡두의 장대한 모습을 이 네 글자보다 더 압축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이 비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고구려 원정 때 세웠다는 전승 때문에 설례비(薛禮碑)라고도 불린다. 물론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라기보다는 노룡두에 전해지는 설화에 가깝다. 1900년 의화단 사건 이후 노룡두를 점령한 영국군이 이곳에 탄약고를 만드는 과정에서 비석이 쓰러졌으며, 1927년 장학량 측에서 이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지금의 노룡두는 1980년대 중국 정부가 대대적으로 복원한 모습이다.
발해를 굽어볼 수 있는 징해루에는 청나라 황제들이 다녀간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누각 벽에는 강희제와 도광제가 징해루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지은 시가 적혀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 비각에는 건륭제가 징해루에서 지은 시 세 편을 새긴 어비가 서 있었다.
마당 한편에는 ‘일작지다(一勺之多)’라는 네 글자를 크게 새긴 비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명나라 장수 유영기(劉永基)가 글씨를 쓰고 왕응예(王應豫)가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1625년의 비석이다. ‘일작지다’는 <중용> 제26장의 다음 구절에서 가져온 말이다.
“이제 물을 말하자면 한 국자에 불과하지만, 그 헤아릴 수 없는 데 이르러서는 큰 자라와 악어와 교룡과 물고기와 자라가 자라나고 재화가 번성한다.”
눈앞의 바다가 단순히 한 국자의 물에서 시작되었다는 뜻만은 아니다. 한 국자에 불과한 작은 물도 끊임없이 쌓이면 마침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바다를 이룬다는 뜻이다. <중용> 제26장이 말하는 ‘지성무식(至誠無息)’, 곧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는 가르침과도 통한다.

건륭제는 징해루에서 지은 시 가운데 한 편에서 이 구절을 그대로 불러냈다. “내게 한 국자의 물이 있어, 그것을 쏟으니 동쪽의 큰 바다가 되었다.” 일작지다의 한 국자 물이 건륭제의 시 안에서 동쪽의 창명(滄溟), 곧 발해로 변한 것이다. 과연 이곳은 “이 바다를 본 뒤에는 다른 물을 물이라 하기 어렵다”는 과장까지도 용납될 만한 바다였을까.
수많은 시인과 묵객이 이 푸른 발해를 노래했다. 그중에는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도 있었다. 조조와 건륭제, 그리고 모택동이다. 물론 그들이 발해를 바라본 시간과 장소는 서로 달랐다. 조조는 207년 오환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늘날 창려현 갈석산으로 비정되는 어느 산에 올라 <관창해>를 지었다고 전한다. 건륭제는 18세기 동순길에 징해루를 여러 차례 찾아 시를 남겼다. 모택동은 한국전쟁 정전 이듬해인 1954년 여름 북대하에 머물며 <낭도사·북대하>를 지었다.
다소 길지만 그들의 시 세 편을 함께 옮겨본다.
조조의 <관창해>
동쪽으로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바라본다.
물결은 얼마나 넘실거리는가.
산과 섬은 우뚝 솟아 있다.
나무는 무성하게 자라고
온갖 풀은 풍성하다.
가을바람은 쓸쓸히 불고
큰 파도는 솟구쳐 오른다.
해와 달의 운행도
이 바다 가운데에서 나오는 듯하고,
찬란한 은하수도
그 속에서 솟아나는 듯하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지극히 기쁘니
노래로써 이 뜻을 읊노라.
東臨碣石,以觀滄海。
水何澹澹,山島竦峙。
樹木叢生,百草豐茂。
秋風蕭瑟,洪波湧起。
日月之行,若出其中;
星漢燦爛,若出其裏。
幸甚至哉,歌以詠志。
조조의 바다는 거대한 우주였다. 해와 달이 그 안에서 운행하고 은하수가 그 속에서 솟아났다. 오환을 평정하여 중국 북방을 장악한 조조는 그 바다를 바라보며 아직 이루지 못한 천하 통일의 꿈을 품었을 것이다.
건륭제의 <재제징해루벽>
내게 한 국자의 물이 있어
쏟아 놓으니 동쪽의 큰 바다가 되었다.
지금도 없고 옛날도 없으며
줄어들지도 않고 차오르지도 않는다.
섣달의 눈도 이보다 희다 하기 어렵고
가을 하늘만이 그 푸름을 함께할 만하다.
모든 강물을 돌아오게 하여 받아들이니
거듭되는 험난함 속에서도 마음은 형통하다.
도리어 어리석은 진시황을 비웃노니
돌을 채찍질하며 봉래와 영주를 찾았구나.
누가 하늘과 자연의 경계를 잊을 수 있으랴.
그대와 함께 이 맑은 물에 씻고 싶다.
我有一勺水,瀉爲東滄溟。
無今亦無古,不減亦不盈。
臘雪難爲白,秋旻差共青。
百川歸茹納,習坎惟心亨。
卻笑祖龍癡,鞭石求蓬瀛。
誰能忘天倪,與汝共濯清。
건륭제의 바다는 조조의 바다와 달랐다. 조조의 바다가 아직 이루지 못한 천하를 향해 열려 있었다면, 건륭제의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는 완성된 제국의 표상이었다. ‘백천귀여납(百川歸茹納)’에는 천하의 모든 물과 백성이 황제의 질서로 귀속된다는 제국적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모택동의 <낭도사·북대하>
큰비가 유연 땅에 쏟아지고
흰 물결은 하늘까지 치솟는데,
진황도 밖으로 고기잡이배가 나갔다.
온통 망망한 바다뿐 배는 보이지 않으니
어느 쪽으로 향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지난 일은 천 년을 넘어갔다.
위무제 조조가 채찍을 휘두르며
동쪽 갈석산에 올라 남긴 시편이 있다.
쓸쓸한 가을바람은 지금도 다시 불지만
인간 세상은 바뀌었다.
大雨落幽燕,白浪滔天,
秦皇島外打魚船。
一片汪洋都不見,知向誰邊?
往事越千年,魏武揮鞭,
東臨碣石有遺篇。
蕭瑟秋風今又是,換了人間。
모택동은 조조의 <관창해>를 직접 불러냈다. 조조의 “동림갈석”을 되받고, “추풍소슬”의 글자 순서를 바꾸어 “소슬추풍”이라 노래했다. 그러나 가을바람이 천 년 전과 같다고 해서 세상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환료인간(換了人間).”
인간 세상이 바뀌었다는 마지막 한마디는 자연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혁명에 대한 선언이었다. 한국전쟁 정전 이후 신중국 최초의 헌법 제정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앞둔 1954년, 모택동은 거친 발해의 파도에서 혁명으로 건설한 새로운 중국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시공간을 달리한 중국의 세 최고 권력자는 발해를 바라보며 무엇을 꿈꾸었을까. 세 편을 한자리에 모아 읽어보니, 그들의 시가 똑같은 뜻을 담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분명했다. 그들의 바다에는 한결같이 정치적 포부가 투영되어 있었다.
조조는 바다에서 아직 이루지 못한 천하 통일을 꿈꾸었다. 건륭제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는 완성된 제국의 질서를 노래했다. 모택동은 천 년 전의 조조를 불러내어 혁명으로 바뀐 새로운 세상을 선언했다.
조조는 바다를 우주로 넓혔고, 건륭제는 바다를 제국 안으로 거두었으며, 모택동은 바다를 혁명의 역사로 바꾸었다. 발해는 말없이 그들의 꿈을 받아 주었다.
그들의 꿈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꿈은 과연 옳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