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고리를 찾아서
이제고리(夷齊故里). 수천 년 전 백이·숙제가 태어나고 자랐다는 전설 속 고향이다. 그곳이 영평부를 지나자마자 나타난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그러나 역시 전설의 고향에 불과했던 것일까? 현지 가이드가 앞장섰지만 이제고리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찾는 것은 ‘夷齊故里’라고 새겨진 작은 비석 하나였다.
마침내 현지 가이드가 한 지점을 특정했다. 새로 지은 듯한 절의 울타리 안이었다. 작은 둔덕 너머 잡풀이 우거진 숲속에 작은 비석 하나가 보였다. 유레카!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정작 ‘夷齊故里’라는 네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저 이제고리를 상상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그곳이 백이·숙제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흔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안내판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찾아낸 것은 이제고리라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이제고리라는 전설을 간직한 평범한 마을이었다. 이제고리는 말 그대로 전설의 고향으로 남았다.

사실 이제고리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백이·숙제를 모신 사당인 이제묘(夷齊廟)를 방문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곳은 연암을 비롯한 역대 연행사들이 즐겨 찾던 명소였다. 연암의 기록에 따르면 사당에는 강희제와 옹정제의 편액이 걸려 있었고, 공자와 사마천의 백이·숙제에 대한 평가를 떠올리게 하는 주련도 있었다.
求仁得仁 萬古淸風 孤竹國
以暴易暴 千秋孤節 首陽山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고죽국에 만고의 맑은 바람이 불고,
폭력으로 폭력을 바꾼다고 꾸짖었으니 수양산의 외로운 절개 천추에 빛나리라.
첫 구절은 《논어》에서 공자가 백이·숙제를 평가한 말에서 가져왔고, 둘째 구절은 《사기》 「백이열전」에 실린 백이·숙제의 「채미가(采薇歌)」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 두 구절에는 묘한 긴장이 있다. 공자는 백이·숙제가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원망이 없다고 했지만, 사마천은 그들이 무왕의 혁명을 비판한 「채미가」를 인용하며 과연 원망이 없었겠느냐고 되물었던 것이다.
이제묘를 다녀오지 못한 아쉬움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였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낮은 구릉이 수양산이라는 현지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쳇!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렇게 나지막한 구릉이 전설의 수양산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연암의 수양산 해주론이 새삼 떠올랐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중국에 수양산이라고 불리는 산이 여러 곳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하동의 포관현, 농서, 낙양 동북쪽, 안사현 서북쪽, 요양 등 여러 지역에 백이·숙제의 유적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맹자가 백이는 은나라의 폭군 주왕을 피해 북쪽 바닷가에 살았다고 한 사실에 주목했다. 우리나라 해주에도 수양산이 있고 백이·숙제의 제사를 지내는데, 중국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암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기자가 조선으로 온 것은 주나라 영토 안에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백이·숙제 역시 주나라 곡식을 먹으려 하지 않았으니, 혹시 기자를 따라 조선으로 온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기자는 평양에 도읍하고 백이·숙제는 해주에 살았던 것이 아닐까? 연암 특유의 역사적 상상력이었다.
물론 중국에 수양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여럿 있다는 사실이 곧 해주 수양산설의 역사적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난하 너머의 나지막한 구릉을 바라보고 있자니 연암이 어째서 수양산을 조선의 해주에서 찾으려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사실 연암은 《열하일기》와는 별도로 「백이론(伯夷論)」 상·하편을 지어 독창적인 백이·숙제론을 펼친 바 있었다. 연암은 먼저 《사기》 「백이열전」의 역사적 서술에 의문을 제기했다. 사마천은 백이·숙제가 은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연암은 그러한 사실이 경서에는 보이지 않는다며 그 역사적 신빙성을 의심했다.
무엇보다 무왕은 은나라 주왕이 현명한 신하를 박해하고 충언을 듣지 않았으며,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명분으로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그런 무왕이 자신에게 간언하는 백이·숙제를 죽이려 했다면 주왕을 정벌한 명분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연암이 백이·숙제의 의리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연암은 백이·숙제와 무왕이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도를 추구했다고 보았다. 백이·숙제가 무왕을 비판한 것은 그의 거사를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리를 밝히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연암의 논리는 「백이론」 하편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미자는 은나라를 떠났고, 비간은 충언하다 죽었으며, 기자는 살아남아 도를 전했다. 태공은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정벌했고, 백이·숙제는 주나라를 섬기지 않았다. 서로 다른 선택이었다.
그런데 연암은 이들의 의리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상수(相須)의 논리다. 태공은 혁명을 통해 백성을 구했고, 백이·숙제는 절개를 통해 후세에 의리의 기준을 남겼다. 태공에게는 백이의 의리가 필요했고, 백이에게는 태공의 의리가 필요했다. 서로 다른 의리가 상호 보완하여 하나의 인(仁)을 이룬다는 것이다.
연암의 백이론은 요즘 표현으로 양시론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양쪽이 모두 옳다는 절충론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의리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상수론이었다. 백이·숙제의 충절을 옹호하다 보면 자칫 주나라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게 되고, 반대로 무왕의 혁명을 정당화하다 보면 백이·숙제의 절개를 부정하게 되는 오랜 논쟁을 연암은 독창적인 상수론으로 풀어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논리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앞서 이제묘의 주련에서 보았듯이 공자는 백이·숙제가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원망이 없다고 했다.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 그러나 사마천은 「채미가」를 인용하며 의문을 제기했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면서도 그것이 잘못임을 알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되물었다. 과연 그들에게 원망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가?

연암은 백이·숙제와 무왕·태공이 각자의 의리를 다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백이·숙제가 무왕의 혁명을 폭력으로 폭력을 바꾼 것이라고 비판했다면, 그들의 의리가 과연 아무런 충돌 없이 상호 보완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자신의 의리를 다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원망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연암의 상수론이 사마천의 질문까지 완전히 해결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연암의 《열하일기》에는 백이·숙제와 관련된 우스꽝스러운 일화가 하나 등장한다.
조장(棗莊)을 지날 때였다. 일행 중 마두 태휘란이 대추나무에서 떨어진 대추를 주워 먹다가 복통을 일으켰다. 뱃속은 비고 목이 타 애를 먹다가 고사리 독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대성통곡을 했다.
“백이, 숙채(熟菜)가 사람 잡네! 백이, 숙채가 사람 죽이네!”
숙제(叔齊)와 숙채(熟菜)의 발음이 비슷한 데서 나온 말장난이었다. 백이숙제론. 그놈의 고사리 ‘숙채’ 때문에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수천 년 묵은 숙제다.

고려보(高麗堡)에서
영평부를 지나 풍윤에 이르렀다. 반원형 마을 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앞면에는 ‘高麗鋪村’이라는 마을 이름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고려포촌의 내력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에 따르면 고려포촌은 은나라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 때 고구려 유민들이 정착했으며, 원나라 때 이곳에 급체포(急遞鋪)를 설치하면서 고려포(高麗鋪)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2003년에는 명나라 가정 30년인 1551년에 세워진 고려포보(高麗鋪堡) 석비가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접한 현지 가이드의 안색이 변했다. 이곳을 병자호란 이후 형성된 조선인 포로촌으로 누누이 강조해 온 현지 가이드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반색하며 놀랄 만한 주장을 펼쳤다. 이곳이 고구려 유민촌이라는 석비의 설명은 그 근거가 분명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이곳이 고구려 강역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가한 희망고문일 수 있겠다 싶었다.
사실 연암도 이곳을 병자호란 이후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들의 마을로 생각했다. 그리고 지명도 고려포촌(高麗鋪村)이라 하지 않고 고려보(高麗堡)로 적었다. 포(鋪)는 우편·통신 시설을, 보(堡)는 군사시설이나 성곽 마을을 의미하는 말이다. 1551년에 세워졌다는 석비의 이름이 고려포보(高麗鋪堡)인 것을 보면 당초 우편·통신 시설과 군사시설로 함께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연암이 사용한 고려보라는 지명도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1551년에 세워진 고려포보 석비의 발굴은 이 마을이 병자호란 이후 처음 형성된 조선인 포로촌이라는 생각에 재검토를 요구한다. 연암을 비롯한 연행사들은 고려보의 오랜 역사 가운데 병자호란 이후 조선인들의 정착에만 주목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연암은 한눈에도 조선인 마을처럼 보였던 고려보를 내심 반겼다. 논농사를 짓고 떡과 엿을 해 먹는 조선의 풍속이 많이 남아 있는 마을이라 하니 그럴 만했다. 그런데 산천은 의구하되 조선인의 인심은 간데없었던 것일까? 고려보에 당도한 연암의 장탄식이 터져 나왔다.
“옛날에는 사신들이 오면 하인들이 사 먹는 술과 음식의 값을 혹 받지 않기도 하고, 부녀자들도 내외하지 않았으며, 어쩌다 고국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을 흘리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말몰이꾼들이 이를 악용하여 마구잡이로 술과 음식을 공짜로 먹는 자가 많이 생기고, 혹 따로 그릇과 의복까지도 억지를 부리며 달라고 하는 자까지 있었다. 같은 나라의 옛 정리를 생각해서 주인이 지키는 것을 그다지 심하게 하지 않으면 그 틈을 노려 훔치기까지 하였으니, 이 때문에 사람들을 점점 싫어하게 되었다.
매번 사행이 도착하면 술과 음식을 감추고 팔지 않으려 하고, 간절하게 요구해야 마지못해 팔긴 하지만 바가지를 씌우고 혹 값을 먼저 치르라고 한다. 이렇게 되자 말몰이꾼들도 반드시 온갖 꾀를 동원하여 사기를 쳐서 분풀이를 하니, 서로 간에 상극이 되어 원한이 깊은 원수를 보듯 한다.
하인들은 이곳을 지날 때는 반드시 일제히 소리를 질러 욕을 하며, ‘네놈들은 고려의 자손들로 너희 할애비가 왔는데도 어찌하여 나와서 절을 하지 않는 게냐?’라고 하면 고려보의 사람들도 맞받아 욕설을 퍼붓는다. 사정이 이렇건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려보의 풍속이 아주 나쁘다고만 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240여 년 전 연암의 탄식이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를 대하는 우리의 민낯을 보는 듯했다. 왠지 기시감을 떨칠 수 없었다.

옥전에서
점심 식사 후 옥전에 도착했다. 옥전은 이번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마음 설레는 곳이었다. 연암이 찾은 ‘보물’을 우리도 찾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240여 년 전 연암은 옥전 성안에 들어가 한가롭게 노닐다가 피리와 노랫소리가 들리는 한 점포에 들어갔다. 연암은 명함을 주고받으며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 돌아가려 했는데, 필체가 정밀하고 반듯한 글들이 백로지(白露紙)에 빼곡하게 적힌 벽을 발견했다.
눈여겨 읽어보니 기이한 문장이었다. 조선 사람들에게 읽히면 입안에 있던 밥알이 벌처럼 뿜어 나오고, 갓끈이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질 것같이 배를 잡고 웃다가 끝내 뒤집어지고 말 보물을 연암이 찾아낸 것이다. 《호질(虎叱)》이었다.
우리는 그 보물을 간직했던 역사적 유적지(?) 심유봉의 가게를 찾아 나섰다. 연암의 아바타가 되어 옥전 서문으로 향하는 길에 늘어선 점포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았다. 아바타를 알아보는 현지인은 한 사람도 없었고, 서화 점포는 물론 골동품 가게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주로 음식점과 생활용품을 파는 가게들로 바뀐 옥전 거리였다.
연암 흉내를 조금이라도 내고 싶어 서점에 들른 게 고작이었다. 뜻밖에도 그곳에서 마오쩌둥이 진황도 북대하에서 자신을 조조와 견주며 쓴 시를 해설한 책 한 권을 건지는 수확이 있었다. 서점을 나서자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환청이 들려왔다. 평소 이명(耳鳴)으로 고생하며 듣는 귀뚜라미 소리가 아니었다. 호랑이의 호통 소리였다. 북곽선생에게 덕지덕지 묻어 있던 분(糞) 냄새도 나는 듯했다. 연암 아바타 놀이, 지나치면 병이 나겠다 싶었다.
사실 《호질》은 옥전의 한 점포에 숨어 있던 보물이 아니라는 설(說)도 많다. 연암의 창작을 중국의 문장으로 위장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 이유는 연암이 청나라 문물을 적극 수용하자고 주장할 수는 있어도 당시 양반사회의 위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는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연암에게 위장 전술이 필요했을 법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양반사회가 사라진 지 참으로 오래인데, 호랑이의 호통 소리는 지금도 여기저기서 쩡쩡 울려 퍼진다. 권력자의 오만을 향한 아첨은 여전하고, 인간중심주의로 인한 생태계 파괴는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호시탐탐(虎視眈眈) 세상을 내려다보며 호통치는 범이 무섭지도 않나 보다.
풍윤에서는 연암의 탄식을 듣고, 옥전에서는 범의 호통 소리에 넋을 잃었다. 계주에 가서는 무슨 소리를 듣게 될까?

계주에서
저녁나절 계주(薊州)에 도착했다. 단둥에서 북경까지 이어 온 장거리 계주(繼走)의 거의 마지막 지점이었다.
계주는 현재 북경의 수도권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에도 연나라의 수도권에 속한 지역이었다. 연나라 태자 단과 형가의 진시황 암살 모의가 펼쳐진 현장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곳은 이곳과 다소 떨어져 있는 계성(薊城)이었다.
다소 실망했지만 그래도 뜻밖의 인물을 뜻밖의 장소에서 만났다. 주선(酒仙) 이태백을 독락사(獨樂寺)라는 절에서 만난 것이다.

산문(山門)을 지나 기세등등한 금강역사로부터 검문을 받았다. 한 역사는 입을 벌리고 있었고, 다른 역사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관문을 무사히 빠져나오자 고요한 야단법석(野壇法席)이 펼쳐졌다. 그 한가운데 팔작지붕을 얹은 목조건축물이 나타났다. 천 년 이상 풍상을 견뎌온 고색창연한 관음각이었다.

그 누각 상층에는 ‘관음지각(觀音之閣)’이라는 편액이 있었고, 휘호자를 나타내는 ‘태백(太白)’이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 주선이 관음보살과 함께 천 년을 동거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관음각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십일면관음상이 서 있었다. 16m 높이의 소조상이 온전하게 서 있으려면 암층(暗層) 하나가 더 필요했을까? 겉으로는 2층 누각이었지만 안으로는 3층 구조였다.

10세기 요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십일면관음상 뒷면에는 15세기 명나라 시대에 조성된 관음상도 있었다. 모두를 압도하는 불상 앞에서 경건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궁금했다. 연암이 누각 아래에서 마주한 와불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연암에 따르면 그 와불이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이태백이라는데 말이다.

관음각을 설명하는 표지판을 읽어보았다. 1780년에 연암이 보았다는 와불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혹시 나만 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나중에 일행에게 물어보았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여러 사람이 찍은 사진 속에도 와불은 없었다. 주선답게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도 했는가?
그런데 뜻밖의 사건을 알게 되었다. 연암이 다녀간 뒤 120년이 지난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수백 명의 독일군이 이곳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혹시 그때 와불도 훼손되어 다시는 복구되지 못한 것일까? 그렇다면 결국 주선은 인간들의 전쟁에 휘말려 종적을 감추었다는 말인가?
계주 일대는 안록산이 절도사로서 군사를 양성한 지역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계주 반산(盤山)에 안록산 사당이 있었을 것이다. 안록산이 있는 곳에 양귀비도 그 곁에 있어야 했을까? 계주에는 양귀비 사당도 있었다고 한다. 연암은 마주하고 있는 두 사당을 두고 분개했다.
“천하에 돈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마는 어찌하여 이따위 음란하고 더러운 사당을 지어 그 명복을 빈단 말인가?”
양귀비가 자기보다 16살 많은 안록산을 양자로 삼고, 그 첫해 안록산의 생일에 그를 목욕시켰다는 《자치통감》의 전승이 떠올라 연암이 욱했을 터이다. 그러나 연암은 혹자의 말을 환기시켰다.
“공자님께서 《시경》을 정리하며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란한 시를 내치지 않고 수록한 까닭은 그 시를 거울삼아 조심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연암은 분통을 터뜨렸지만 이 말로 위안을 삼았던 것 같다.
문득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이태백과 그 사랑의 비극을 노래한 백거이를 떠올렸다. 이태백의 「청평조사(淸平調詞)」와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다.
현종에게 궁중으로 불려 온 이태백은 그들의 화양연화 시절을 노래했다.
이름난 꽃과 경국지색이 서로 어우러지니
임금은 언제나 미소 지으며 바라보네.
(名花傾國兩相歡 長得君王帶笑看)
반면에 백거이는 양귀비의 처형을 눈앞에 둔 현종의 사랑의 비극을 노래했다.
임금은 얼굴을 가린 채 구하지 못하고
돌아보니 피눈물이 뒤섞여 흐르는구나.
(君王掩面救不得 回看血淚相和流)
그리고 양귀비의 혼으로 하여금 사랑의 약속을 떠올리게 했다.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고.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연암에게 묻고 싶었다. 양귀비에 대한 연민의 정은 없으셨나요?
저녁 식사 후 마지막 밤을 간이 주점 노상에서 보냈다. 여행 중 즐거웠거나 아쉬웠던 일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일행 중 누군가 요동백시(遼東白豕)의 뜻을 물었다. 국문학을 전공한 인솔 교수님에게도 낯선 사자성어였다.
챗이 재빠르게 답했다. ‘옛날 요동에서 어느 농부가 돼지에게서 머리가 흰 새끼가 태어나자 신기하게 여겨 나라님에게 바치려 했다. 하동에 이르러 돼지 떼가 모두 흰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며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동백시는 자신의 좁은 경험을 세상의 전부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말이다.’
우리는 지난 엿새 동안 요동을 두루 거쳐 왔다. 요동백시가 될까 두려운 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