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황구선입해처에서
전날 노룡두의 야경을 감상한 탓일까? 밤잠을 설쳤다. 그런데도 새벽이 되자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집사람과 단둘이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의 택시에 몸을 싣고 ‘진황구선입해처(秦皇求仙入海處)’로 달려갔다.
진황구선입해처는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꿈꾸며 방사(方士)들을 바다로 보냈다는 곳이다. 물론 그곳이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바로 그 장소일 리는 없겠지만, 진시황의 불로장생 욕망이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꽝이었다. 1990년대 초에 조성된 이 관광지는 오전 9시 이후에나 입장이 가능했고, 우리는 오전 7시까지 진황도 숙소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불로장생의 꿈이 무위로 돌아간 만큼, 그 욕망의 흔적을 보는 것조차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새벽 나들이에도 나름의 소득이 있었다. 집사람과 함께 신선이 되어 동트는 바닷가 모래를 밟으며 입해(入海) 놀이를 한 것이다. 모처럼 맨발로 물장구치며 동심으로 돌아가는 신선 놀음을 했으니 구선입해처는 허명만은 아니었다.

각산장성을 오르며
아침 식사 후 우리 일행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각산장성(角山長城)이었다. 각산은 산해관 북쪽 약 3㎞에 위치하며, 만리장성이 노룡두에서 산해관을 거쳐 북쪽으로 뻗어가면서 만나는 첫 번째 높은 산이다. ‘만리장성 제일산’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각산의 최고봉인 대평정(大平頂)은 해발 519m에 지나지 않지만, 정상까지 이어지는 능선에는 용의 뿔처럼 큰 바위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어 천혜의 요새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각산장성의 산허리에 있는 서현사(棲賢寺)였다.

곤돌라를 타고 가는 길이어서 몸과 마음이 가뿐했다. 그러나 경거망동은 금물이었다. 오르면 오를수록 천하제일관 산해관의 몸집은 작아져 갔고, 그만큼 집사람의 동공도 나의 심장도 콩알만 해져 갔다. 각산의 용뿔이 험악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곤돌라 종착지에 안착했다.
곤돌라에서 내리자마자 뜻밖의 숫자를 만났다. 산허리에 세워진 백색 입간판에 적힌 ‘1314’였다. 무슨 역사적인 해인가 싶었다. 일행 모두가 궁금해했지만 누구도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지 못했다.

그때 챗GPT가 불쑥 나섰다. 숫자 1314는 중국어로 ‘일생일세(一生一世)’와 발음이 비슷해 ‘한평생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라는 뜻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그 말에 경탄한 부부들이 ‘1314’ 앞으로 달려가 인생 사진을 찍었다.
서현사는 곤돌라 종착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열하일기》에는 각산사로 기록된 이 절은 저녁놀이 머무는 서하사(棲霞寺)라고도 불렸다. 명나라 때부터 현명한 인재들이 모여 독서하는 서현사로 알려졌다고 한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산해관을 대표하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글씨를 쓴 사람은 15세기 후반 이곳 각산에 머문 소현(蕭顯)이라는 은퇴 관리였다고 한다. 그는 고단한 관리 생활에서 벗어난 기쁨에 겨워 이곳 각산에 초당을 짓고, 흥이 나면 도연명인 양 술을 마시고 감회가 일면 두보의 시를 자주 읊었다고 한다.
그런데 만리장성 제일산인 각산의 산중턱에서 전쟁의 영웅 대신 소현 같은 은일(隱逸) 시인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1644년 명·청의 운명을 좌우한 산해관 전투의 현장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곳에서 말이다.
1644년 갑신년 산해관 전투의 현장에서
산 아래를 바라보니 서쪽 방향으로 이자성의 20만 대군과 오삼계와 도르곤의 10만 군대의 치열한 싸움터였던 석하(石河)와 일편석(一片石)이 보일 듯했다. 단 3일의 전투로 이자성은 북경 방면으로 물러나고 오삼계와 도르곤은 그 뒤를 쫓았다. 대순의 황제 이자성은 북경 체류 수십일만에 모든 것을 잃고 그 이듬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산으로 오를 때는 자연 경관에 도취되어 심장이 뛰었는데 바다를 바라보며 내려가는 길에는 1644년 갑신년 산해관 전투 생각에 뇌회로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각산장성 입구에는 이자성(李自成)의 석상이 당당히 서 있었다. 산해관 전투의 승자인 도르곤(多爾袞)과 오삼계(吳三桂)의 동상은 보이지 않았다.
패자는 당당히 서 있는데 승자는 흔적도 없다. 어찌 된 일일까? 그 비밀을 풀어줄 단서는 1644년 갑신년의 역사, 특히 이자성의 명나라 멸망과 대순정권의 몰락을 다룬 갑신사감관(甲申史鑑館)에 있을 듯했다.
우리 일행은 시간 관계상 그곳을 직접 관람하지 못했다. 그러나 갑신년의 역사를 오늘날 중국이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살펴보려면 1944년 곽말약(郭沫若)이 발표한 《갑신삼백년제(甲申三百年祭)》를 빼놓을 수 없다.
곽말약은 명나라 멸망 300주년을 맞아 중경(重慶)에서 발행되던 《신화일보(新華日報)》에 이 글을 연재했다. 그는 이자성이 이끈 농민군의 성공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권력을 장악한 이후 지도부의 교만과 부패, 내부 갈등으로 대순정권이 몰락한 과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국민당과 치열하게 대립하던 모택동(毛澤東)은 이 글에 주목했다. 그는 곽말약의 글을 공산당 간부들의 학습자료로 활용하도록 했다. 혁명의 성공 못지않게 성공 이후의 국가 운영을 고민하던 모택동에게 이자성의 실패는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었던 것이다.
1949년 국공내전의 승리를 앞두고 북경으로 향하던 모택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북경으로 시험 보러 간다(進京趕考).” 이 말은 이자성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모택동의 다짐이기도 했다. 300년 전 이자성이 실패한 시험을 이제 자신들이 치르러 간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곽말약은 이자성을 공동의 적으로 삼고 청나라의 도르곤에게 귀순한 오삼계를 기회주의자의 전형적 인물로 규정했다.
오삼계는 1662년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永曆帝)를 곤명(昆明)에서 교살할 정도로 청나라에 충성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1673년 강희제의 삼번 철폐 정책에 반기를 들고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반청복명의 명분까지 내세웠으니 명나라 유민들이라고 해서 그를 흔쾌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한 번은 명을 배반하고, 또 한 번은 청을 배반한 것이다. 곽말약 같은 역사평론가들이 오삼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리 없었다.
그런데 오삼계를 궁지에 몰아넣은 사람은 곽말약만이 아니었다. 명말청초의 시인 오위업(吳偉業)은 《원원곡(圓圓曲)》에서 오삼계가 진원원(陳圓圓)이라는 여인 때문에 격노하여 청나라에 귀순한 것처럼 묘사했다.
충관일노위홍안(衝冠一怒爲紅顏). 미인을 위해 분노가 치밀어 관을 치켜올렸다는 뜻이다. 이 한 구절은 오삼계를 나라의 운명보다 여인을 앞세운 남자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오삼계로서는 억울할 법도 했다.
오늘날 중국의 역사적 기억에서도 이자성과 오삼계의 위상은 사뭇 달라 보인다. 물론 역사학계의 평가를 한 가지로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각산장성 입구에서 마주한 풍경만큼은 그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1644년 갑신년 산해관 전투의 승자는 보이지 않고 패자만이 당당하게 서 있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 속에서 과거의 승자는 버려지고 과거의 패자가 역사의 거울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화는 현재진행형이자 미래형이기도 하다. 언제 누군가에 의해 전혀 다른 대화가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기에 기회주의자의 전형으로 낙인찍힌 오삼계가 어느 날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를 째째한 남자로 매도한 오위업에게 항변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당신들은 맹자의 말씀도 모르느냐?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生亦我所欲也,義亦我所欲也). 나는 나의 삶과 나의 의에 따랐을 뿐이다. 여자 때문에 명을 배신한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청을 선택했을 뿐이다.” 충관일노위홍안(衝冠一怒爲紅顏)!
과연 오삼계를 무덤에서 벌떡 일으키고 남을 말이다.

영평성에서
각산장성을 벗어났다. 얼마 가지 않아 아름다운 옛 성, 영평성(永平城)에 도착했다. 이제 북경까지 가는 길에는 더 이상 전쟁 이야기가 없겠다 싶었다. 본격적인 연암의 관내정사(關內程史)가 펼쳐질 차례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자성과 오삼계의 망령이 여전히 우리 일행을 따라붙고 있었다.
1644년 산해관 전투에서 도르곤과 오삼계의 연합군에 패배한 이자성은 북경으로 퇴각하는 길에 이곳 영평부에서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吳襄)을 처형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영평성에서는 그보다 14년 앞서 또 하나의 비극이 벌어졌다. 1630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던 아민(阿敏)이 영평성에서 철수하면서 주민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1629년 홍타이지는 산해관을 우회해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인근을 공격하고 영평성을 점령했다. 이듬해 명군이 반격하자 영평성에 주둔하던 아민은 수많은 주민을 학살하고 철수했다. 그때 손승종(孫承宗)의 지휘 아래 조대수(祖大壽)와 오양이 이끄는 명군이 영평성을 탈환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후금군을 몰아내고 영평성을 되찾았던 오양이 14년 뒤 바로 이곳에서 명나라를 무너뜨린 이자성에게 처형당한 것이다.
아민의 운명도 기구했다. 홍타이지는 영평성에서의 군사적 실패와 주민 학살, 독단적인 행동 등을 문제 삼아 그의 군권을 박탈하고 감금했다. 아민은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1640년 옥중에서 죽었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점령했던 도르곤은 산해관 전투의 승리로 청나라의 북경 입성을 주도하고 사실상 최고의 권좌에 올랐다. 과연 천도란 있는 것일까 싶었다.
문득 궁금했다. 연암을 비롯한 조선의 연행사들은 이러한 역사를 몰랐던 것일까? 내가 살펴본 연행 기록에서는 아민의 영평성 주민 학살에 비분강개한 대목을 찾기 어려웠다. 조선을 침략했던 장수의 만행과 몰락이 어찌 관심 밖의 일이었을까. 알고도 기록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아직 찾아내지 못한 것일까.
연암은 영평부의 지형이 평양을 닮았다고 했다. 성 밖으로 긴 강이 성을 감싸 돌며 흐르고, 멀리 넓은 들판과 산들이 펼쳐져 있었다. 영평성 성루에 올라 바라보니 고려시대 학사 김황원이 평양을 묘사한 시구가 오히려 이곳에 더 잘 어울린다고 할 정도였다.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긴 성 한쪽으로 강물은 넘실넘실 흐르고,
넓은 들판 동쪽 끝에는 산들이 점점이 솟아 있네.
영평성은 무인지경이 아니었다. 성 안은 붐비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일상은 이어지고 있었다.

연암이 조선 사신단의 모습을 형편없이 그렸다며 〈고려진공도(高麗進貢圖)〉를 품평하고, 조선 사신단이 구입한 화첩에 작가의 이름을 써 주었던 그 집을 찾을 길은 없었다. 다만 어느 집 대문 앞에 웃통을 벗은 덩치 큰 중국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쩐지 옛 중국 풍속화에서 걸어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한때 이 성을 차지하려던 장수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영평(永平). 영원한 평화를 찾았나 보다.




